로맨스 분류
노리로리 -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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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떤 여자B
“휴우…”
지하철 역에서 연구실까지 올라오는 것도 만만치 않은 거리다.
여기에 일요일 아침이라 다니는 사람들이 없으면 더 길게 느껴지곤 한다.
열쇠를 꽂고, 문을 열면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썰렁하니 텅 빈 연구실.
도착했다… 뭔가 큰 일이라도 해 낸 것처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창문을 연다.
오늘도 여느 때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일요일이다.
단지 굉장히 화창한 가을 날씨라는 것을 빼면.
아마도 추워지기 전 마지막 가을 날씨가 아닌가 싶다.
던져놓은 가방을 열고 읽던 논문 복사본을 꺼낸다.
원래부터 내가 이토록 착실하게 연구실로 출근한 건 아니었다.
집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학교엔 일주일 두 번 있는 수업이 없으면 잘 오지 않으니까.
특히 매주 일요일 아침에 꼬박꼬박 나올 이유는 없다. 일도 없는 걸.
단지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벌컥) “안녕”
“…어머.”
바로 이 사람, 임이안 선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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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몰라, 난 몰라, 난 몰라… 어떡해…”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재작년 겨울.
나는 아직 3학년이었고, 미래에 대해선 잘 몰랐고, 청바지에 스웨터를 걸쳤으며, 머리를 감지 않은 상태였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중국문화의 이해’ 기말시험 전날에 늦잠 자서 시험시간에 2시간 지각한 상태였다.
…라는 것은, 즉, 결시 확정.
가보나 마나 이미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정신 없이 조교실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조교실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 그가 있었다.
“제발 들어올 때는 노크 정도는 하고… 어, 무슨 일이에요?”
조교실 문이 야만스러울 정도로 벌컥 열리자 한숨을 내쉬며 책을 내려놓던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꽤 당황했다. 그 정도로 내 몰골이 처참했던 것 같다.
“흑… 저기… 시험에 늦어서… 훌쩍…”
“몇시 무슨 수업인데요?”
“열한시…훌쩍… 중국문화이해… 핵...핵…”
그는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더니 눈을 잠시 감고 말을 이었다.
“난 또 큰 일이나 난 줄 알았네. 선생님한테 이메일 보내서 사정 말씀 드리시고, 추가시험 따로 보세요. 아마 조금 점수가 깎이긴 하겠지만.”
“흐윽… 그게… 선생님이 시험 끝나자마자 바로 내려가신다고… 다시 서울에 안 오신다고… 흑…”
“…….”
시험날 바로 서울 뜨니까 기말시험 끝나고는 어떤 과제물이나 시험지 제출도 불가능하다는 선생님의 강조…
마지막 수업 시간에 왜 저런 걸 지겹게 설명하나 했는데. 내 얘기가 될 줄은 몰랐었다.
“어, 명진이형 수업이구나. 그럼 큰일인걸.”
“어…어떡하죠…“
그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한명진 선생님 핸드폰인가요? 저 이안이요. 저기… 지금 출발하시나요? 아, 지금 광주 내려가신다구요? 아직 서울이시죠?”
그가 통화 중에 나를 흘끔 보더니, 뭔가 결정한 듯 수화기를 다른 손으로 바꿔 든다.
“저기, ***선생님이 형한테 뭐 맡겨놓으신 것 같던데…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예. … 아, 그럼 찾으러 오신다구요?”
그의 하얀 얼굴에 엷게 미소가 비친다.
“저기 근데 지금 학생 한 명 와 있는데… 갑자기 급한 사정이 있어 시험에 늦었다고 하거든요? 형 오실 때까지 조교실에서 시험 봐도 될까요? 네. 그럼 오세요.” (딸깍)
그리곤 만족스런 표정으로 전화를 끊더니, 몸을 돌려 내게 말했다.
“선생님 오실 때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릴 테니까, 시험을 여기서 보도록 하죠. 아, 그전에 요 밑에 라운지에 가서 음료수 선물세트 하나만 사 오세요.”
“고맙습니다아… 근데 음료수는 왜…?”
그가 자세를 고쳐 앉아 다시 무표정하게 책을 펴며 말한다.
“이따가 명진이형이 찾아가실 물건이 필요하거든요. 가능하면 까만 봉투에 꼭꼭 싸달라고 하세요.”
……
그렇게 해서 난 무사히 기말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내용물을 확인하고 낙담해 하셨지만 나는 덕분에 시험지를 제출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하나씩 던져주고 가신 문제의 음료수를 뜯어 마시면서 그가 말했다.
“다음부턴 시험에 지각 같은 거 하지 마세요.”
“네에…”
그리고 난 들었다. 그의 혼잣말…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지각한 학생치곤 글 참 잘 쓰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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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부터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선배.
그가 올해부터 학교 근처 원룸으로 이사 와서 가끔 연구실에 나온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나의 일요일 출근은 시작되었다. 뭐, 그가 생각보다 게을러서 아침나절에 나오는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긴 했지만. 이후에도 일요일에 그를 만난 적은 없었지만, 버릇이 되어서 그냥 나왔다.
오늘은 운수대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와, 오빠 웬일이에요? 이 이른 시각에.”
난 애써 반가움을 감추며 물어 본다.
“왜, 뭐가 이상해?”
“아니,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다는 생각이…”
“…너무 하는 걸.”
그는 처음 조교실에서 본 그 자세 그대로 반듯이 걸터앉아 책을 펼쳐든다.
의자에 완전히 기대지 않은 채 곧게 편 허리.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약간 못마땅한 얼굴로, 가끔 입과 턱 주변을 문지른다.
……
“네가 와 줘서 다행이다.”
“뭘요. 저야말로 오빠가 와서 다행인데요.”
볶음밥 두 그릇이 책상 앞에 놓였다. 그와 함께 학교 안에서 배달요리를 먹는 것은 꽤 오랜만이다. 작년에는 함께 일하던 조교실에서 가끔 시켜 먹곤 했는데… 난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이듬해 학부조교에 지원했고, 결국 그의 친한 후배가 될 수 있었다. 함께 음식 배달 주문할 때마다 그를 의식한 탓에, 내 몫으로 짜장면을 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 결과, 그는 아직도 내가 볶음밥을 제일 좋아하는 줄 안다.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어? 생각은 뭘.”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식사나 일을 하면서 말이 없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르다. 밥 한 술을 뜨면서도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빛이다.
그의 그런 눈빛은 책을 볼 때나, 가끔 여자친구 얘기를 할 때 외에는 본 적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나저나 너같이 젊은 애가 왜 이 좋은 날에 연구실에 있는 거야?”
“공부해야죠.”
“하하, 말도 안돼. 네가 자꾸 그러니까 남친이 없는 거야.”
“똑같이 연구실 처박혀 있는 젊은 오빠한테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
내가 누구 때문에 남친이 없는데. 괜히 심술이 나서 퉁명스레 말해 버렸다.
이럴 땐 바로 사과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
하루 종일 자책감에 시달리느니…
“……미안해요. 농담 농담.”
“아냐. 괜찮아.”
“혜경이 언니한테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어요?”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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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경.
이듬해(그러니까 작년) 봄학기부터 조교실에서 같이 일했지만, 이안 선배한테 여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학기가 거의 끝날 때가 다 된 5월에서였다. 그답지 않게 수줍어하며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의 눈빛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하지만 현실감 있게 다가오진 않았었다.
그녀가 내 눈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저… 여기… 임이안씨 근무하는 곳 맞죠?”
“예에… 실례지만 누구신지…?”
“저… 이안씨 친군데요…”
”……!!”
조교들끼리 엠티를 가기로 한 그 해 여름, 수유리로 가기 위해 조교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 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처음 연구실에 그 언니가 나타났을 때, 난 위축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얼핏 봐도 170 가까이 되어 보이는 키에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멋진 몸매, 거기다가 화사한 외모는 칙칙한 연구실을 환히 밝힐 정도였다. 엠티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짧은 분홍빛 원피스는 그녀의 육감적인 곡선미를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웨이브진 그녀의 풍성한 긴 머리결에선 여자인 나도 두근거릴 만한 좋은 향기가 났다.
…나는 그녀에 비하면 키만 비슷한 선머슴 같은 여자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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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가끔 그녀를 볼 때마다 나는 지독한 상실감에 젖어야만 했다.
그녀의 터질 것 같은 여성미와 나의 와일드한 모습을 비교해 가며…
그런 사람들은 종종 남들의 추격 의지 자체를 꺾는 면이 있다.
그래서 그가 하루에 한 번 꼴로 전화를 받으러 연구실 밖으로 나갈 때도, 나는 딱히 질투심을 가질 수조차 없었다.
그녀의 전화를 받는 그의 눈동자는 평소와는 다른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뭐랄까… 그가 정말 관심 있는 책을 읽을 때의 그것이었다.
그 질릴 정도로 황홀한 언니와 그가 헤어진 것은 한 달쯤 전인 것 같다.
오늘은 내게 주어진 기회가 아닐까.
그릇을 치우면서, 나는 마침내 밥 먹는 내내 속으로 되뇌인 말을 꺼냈다.
“오빠 날도 좋은데 영화나 보러 갈래요?”
“어…”
“’내 머리 속의 화이트’ 개봉했던데.”
딱히 멜로영화가 보고 싶다거나, 정우성이 마음에 든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난 그런 식의 감정 표출이 수치스럽다)
마침 생각난 요즘 영화가 그것밖에 없었을 뿐…
그는 문득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선약이 있어서.”
“혹시 딴 여자 만나요?”
“아냐. 그런 거.”
내가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해 참견할 자격은 없다.
하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고 밋밋하게 답한다.
그리곤 그답지 않게 진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한다.
“미안, 은정이가 모처럼 불쌍한 선배 구제해 주려고 했는데.”
“그러게요. 아~아. 공부나 할까.”
……
1시쯤 이안 오빠는 짐을 챙겨 일어났다.
가방을 들고 일어나면서 멋적은 얼굴로 말한다.
“가봐야겠다. 먼저 가서 미안.”
“나중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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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데 가봐야 될 것 같아. 먼저 가서 미안.”
“에~ 그런 게 어딨어~!!”
“여친이랑 먼저 사라지는 거 반칙이에요!!!”
작년 여름 그의 여자친구 혜경을 처음 본 날, 둘은 산 기슭의 민박집에서 자정쯤 먼저 자리를 떴다. 원성이 자자했으나 그는 멋적은 얼굴을 하고 여친과 함께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다음부턴 모든 것이 심드렁했다. 박사과정 선배의 학술적인 얘기도, 가끔 나오는 드라마와 가십성 얘기들도 모두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울했다. 수시로 들이키는 맥주만이 나의 침묵을 정당화해 주었다.
한 20분만에 맥주 두 캔을 비우니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야~ 막내~ 어두운 데 조심해라~”
“누구 같이 가줘야 되는 거 아냐?”
“괜찮아요.”
대학원 선배들의 염려를 뒤로 하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왠지 멀리 떨어져 있는 민박집 공동화장실은 가고 싶지 않았다. 더러울 것은 뻔했고 왠지 무섭기도 했다. 난 근처에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몰래 일을 치룰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거의 눈에 안 뜨일 정도로 후미진 둔덕 곁으로 뭔가 흰색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순간 얼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 흰 빛(사실 분홍색)의 인영…
그건 분명 이안 오빠의 여친, 혜경의 화사한 분홍색 원피스였다.
나는 홀린 듯 소리를 죽이고 그 근처로 향했다.
“아… 으음… 아…”
“헉…헉… 으으…”
역시 예상대로 그 그림자는 그와 그녀였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들이 후미진 숲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는 뻔했다.
“아… 몰라… 어떡해…”
“헉… 혜경아… 좋아…? 응…?”
“앙… 오빠 정말 미쳤어… 어떻게 여기서… 하앙…”
그녀의 몸은 나무에 두 손을 잡고서 간신히 지탱되고 있었고, 분홍빛 원피스는 엉덩이 위로 완전히 말려 올라간 채였다. 이안 오빠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부여잡은 채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퍽… 퍽…)
“헉…허억… 내 말대로… 큭… 짧은 원피스 입고 오길… 잘했지…?”
“학학…아~…워…원래부터… 이럴려구 그런 거였어…? 아히~”
“하하… 이것도… 헉… 색다르고 좋지 않아… 응?”
“아~ 몰라… 아, 아~ 아…”
난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은 채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와 그녀의 하얀 다리가 눈을 찌른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점점 커져 간다.
“아…아~ 아~! 아하… 오빠 나 어떡해… 하앙…”
“어…크윽… 혜경아… 나… 이제…”
그의 허리가 그녀가 쓰러질까 걱정될 정도로 강하게 부딪혀오면서 그녀의 교성이 한 옥타브 정도 올라간다. 아름다운 지체를 푸르르 떠는 그녀.
난 더 이상 그들의 광연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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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아…음…”
그가 연구실을 나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나는 어느 샌가 바지 안에 손을 집어넣어 문지르고 있다.
충격적인 목격을 한 그날 이후, 난 아주 가끔씩이지만 이안 오빠와 혜경, 그들의 그날 밤 모습을 생각하며 마스터베이션을 하곤 했다. 평소의 차분하던 모습과 달리, 욕망에 타오르던 이안 오빠의 실루엣은 충격적이었을 뿐 아니라 너무나 외설스러운 장면이었다.
끝까지 다 보지 못한 그들의 정사는 상상력의 힘을 빌어 내 머리 속에서 끝없이 반복 재생산되었다. 그 상상 속에서 나는 혜경 언니가 되었다가, 이안 오빠가 되었다가를 반복하지만 어인 일인지 나 자신을 대입시키지는 못한다.
“으… …으음!!”
오늘은 평소보다 빨리 젖어버린 것 같다.
왠지 그 때에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흘러내린다.
……
……
오늘도 그는 연구실에서 같은 자세로 책을 읽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가끔 휴대폰을 꺼내본다는 것이었다.
그리곤 작게 한숨을 내쉰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날 때의 그 한숨이다. 뭔가 한심하다는.
잠시 뭔가 생각한 다음 같은 자세로 앉아 문자를 찍는다.
누구한테서 온 문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혜경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문자를 입력하고 있는 그의 눈빛이 그녀와 통화할 때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호기심으로 충만한, 빛나는 눈빛.
그 이후로 혜경으로부터는 연락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단지 통화 대신에 문자로 바뀐 것 뿐.
“어 은정이 왔구나. 마침 잘 됐다. 저녁이나 먹으러 갈래? 내가 쏘지.”
“…….”
그의 건조하지만 따뜻한 목소리.
난 그의 눈을 본다.
밥 먹을 때나 일할 때와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지루하다는 눈빛.
“…죄송해요, 선약이 있어서요.”
……
언제나처럼 또 아침이 왔다.
매서운 찬바람이 코트를 여미게 한다.
이미 낙엽이 사라져버린 거리는 온통 회색으로 덮인 것 같다.
지난 일요일의 화창한 날씨가 마치 잠깐의 환상이었던 것처럼.
나는 무엇을 위해서인지, 또다시 신촌의 일요일 아침 거리를 그렇게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 다 끝나기 전에
그 이름을 불러야 할 텐데
내가 지금 여기 서 있다고
이제 연극이 끝나고 조명이 꺼지면
관객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어느새 난 까맣게 잊혀질 텐데
널 위한 무대 위에서
난 언제나 그냥 지나가는 사람
이름도 없이 대사도 없이
화려한 불빛 아래 서 있는
너의 곁을 잠시 지나가는 사람
운명이 내게 전해준 배역
어떤 사람
- 윤상, ‘어떤사람A’
* 4부는 5부 이후와 전개상 약간 다른 내용이라 먼저 올립니다.
(은정이는 아마 앞으로 나올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 보잘것 없는 글에 생각지도 못한 성원 보내주셔서 놀랐습니다.
가능한한 빨리...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휴우…”
지하철 역에서 연구실까지 올라오는 것도 만만치 않은 거리다.
여기에 일요일 아침이라 다니는 사람들이 없으면 더 길게 느껴지곤 한다.
열쇠를 꽂고, 문을 열면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썰렁하니 텅 빈 연구실.
도착했다… 뭔가 큰 일이라도 해 낸 것처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창문을 연다.
오늘도 여느 때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일요일이다.
단지 굉장히 화창한 가을 날씨라는 것을 빼면.
아마도 추워지기 전 마지막 가을 날씨가 아닌가 싶다.
던져놓은 가방을 열고 읽던 논문 복사본을 꺼낸다.
원래부터 내가 이토록 착실하게 연구실로 출근한 건 아니었다.
집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학교엔 일주일 두 번 있는 수업이 없으면 잘 오지 않으니까.
특히 매주 일요일 아침에 꼬박꼬박 나올 이유는 없다. 일도 없는 걸.
단지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벌컥) “안녕”
“…어머.”
바로 이 사람, 임이안 선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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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몰라, 난 몰라, 난 몰라… 어떡해…”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재작년 겨울.
나는 아직 3학년이었고, 미래에 대해선 잘 몰랐고, 청바지에 스웨터를 걸쳤으며, 머리를 감지 않은 상태였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중국문화의 이해’ 기말시험 전날에 늦잠 자서 시험시간에 2시간 지각한 상태였다.
…라는 것은, 즉, 결시 확정.
가보나 마나 이미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정신 없이 조교실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조교실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 그가 있었다.
“제발 들어올 때는 노크 정도는 하고… 어, 무슨 일이에요?”
조교실 문이 야만스러울 정도로 벌컥 열리자 한숨을 내쉬며 책을 내려놓던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꽤 당황했다. 그 정도로 내 몰골이 처참했던 것 같다.
“흑… 저기… 시험에 늦어서… 훌쩍…”
“몇시 무슨 수업인데요?”
“열한시…훌쩍… 중국문화이해… 핵...핵…”
그는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더니 눈을 잠시 감고 말을 이었다.
“난 또 큰 일이나 난 줄 알았네. 선생님한테 이메일 보내서 사정 말씀 드리시고, 추가시험 따로 보세요. 아마 조금 점수가 깎이긴 하겠지만.”
“흐윽… 그게… 선생님이 시험 끝나자마자 바로 내려가신다고… 다시 서울에 안 오신다고… 흑…”
“…….”
시험날 바로 서울 뜨니까 기말시험 끝나고는 어떤 과제물이나 시험지 제출도 불가능하다는 선생님의 강조…
마지막 수업 시간에 왜 저런 걸 지겹게 설명하나 했는데. 내 얘기가 될 줄은 몰랐었다.
“어, 명진이형 수업이구나. 그럼 큰일인걸.”
“어…어떡하죠…“
그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한명진 선생님 핸드폰인가요? 저 이안이요. 저기… 지금 출발하시나요? 아, 지금 광주 내려가신다구요? 아직 서울이시죠?”
그가 통화 중에 나를 흘끔 보더니, 뭔가 결정한 듯 수화기를 다른 손으로 바꿔 든다.
“저기, ***선생님이 형한테 뭐 맡겨놓으신 것 같던데…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예. … 아, 그럼 찾으러 오신다구요?”
그의 하얀 얼굴에 엷게 미소가 비친다.
“저기 근데 지금 학생 한 명 와 있는데… 갑자기 급한 사정이 있어 시험에 늦었다고 하거든요? 형 오실 때까지 조교실에서 시험 봐도 될까요? 네. 그럼 오세요.” (딸깍)
그리곤 만족스런 표정으로 전화를 끊더니, 몸을 돌려 내게 말했다.
“선생님 오실 때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릴 테니까, 시험을 여기서 보도록 하죠. 아, 그전에 요 밑에 라운지에 가서 음료수 선물세트 하나만 사 오세요.”
“고맙습니다아… 근데 음료수는 왜…?”
그가 자세를 고쳐 앉아 다시 무표정하게 책을 펴며 말한다.
“이따가 명진이형이 찾아가실 물건이 필요하거든요. 가능하면 까만 봉투에 꼭꼭 싸달라고 하세요.”
……
그렇게 해서 난 무사히 기말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내용물을 확인하고 낙담해 하셨지만 나는 덕분에 시험지를 제출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하나씩 던져주고 가신 문제의 음료수를 뜯어 마시면서 그가 말했다.
“다음부턴 시험에 지각 같은 거 하지 마세요.”
“네에…”
그리고 난 들었다. 그의 혼잣말…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지각한 학생치곤 글 참 잘 쓰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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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부터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선배.
그가 올해부터 학교 근처 원룸으로 이사 와서 가끔 연구실에 나온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나의 일요일 출근은 시작되었다. 뭐, 그가 생각보다 게을러서 아침나절에 나오는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긴 했지만. 이후에도 일요일에 그를 만난 적은 없었지만, 버릇이 되어서 그냥 나왔다.
오늘은 운수대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와, 오빠 웬일이에요? 이 이른 시각에.”
난 애써 반가움을 감추며 물어 본다.
“왜, 뭐가 이상해?”
“아니,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다는 생각이…”
“…너무 하는 걸.”
그는 처음 조교실에서 본 그 자세 그대로 반듯이 걸터앉아 책을 펼쳐든다.
의자에 완전히 기대지 않은 채 곧게 편 허리.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약간 못마땅한 얼굴로, 가끔 입과 턱 주변을 문지른다.
……
“네가 와 줘서 다행이다.”
“뭘요. 저야말로 오빠가 와서 다행인데요.”
볶음밥 두 그릇이 책상 앞에 놓였다. 그와 함께 학교 안에서 배달요리를 먹는 것은 꽤 오랜만이다. 작년에는 함께 일하던 조교실에서 가끔 시켜 먹곤 했는데… 난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이듬해 학부조교에 지원했고, 결국 그의 친한 후배가 될 수 있었다. 함께 음식 배달 주문할 때마다 그를 의식한 탓에, 내 몫으로 짜장면을 시킨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 결과, 그는 아직도 내가 볶음밥을 제일 좋아하는 줄 안다.
“오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어? 생각은 뭘.”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식사나 일을 하면서 말이 없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르다. 밥 한 술을 뜨면서도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빛이다.
그의 그런 눈빛은 책을 볼 때나, 가끔 여자친구 얘기를 할 때 외에는 본 적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나저나 너같이 젊은 애가 왜 이 좋은 날에 연구실에 있는 거야?”
“공부해야죠.”
“하하, 말도 안돼. 네가 자꾸 그러니까 남친이 없는 거야.”
“똑같이 연구실 처박혀 있는 젊은 오빠한테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
내가 누구 때문에 남친이 없는데. 괜히 심술이 나서 퉁명스레 말해 버렸다.
이럴 땐 바로 사과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
하루 종일 자책감에 시달리느니…
“……미안해요. 농담 농담.”
“아냐. 괜찮아.”
“혜경이 언니한테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어요?”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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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경.
이듬해(그러니까 작년) 봄학기부터 조교실에서 같이 일했지만, 이안 선배한테 여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학기가 거의 끝날 때가 다 된 5월에서였다. 그답지 않게 수줍어하며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의 눈빛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하지만 현실감 있게 다가오진 않았었다.
그녀가 내 눈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저… 여기… 임이안씨 근무하는 곳 맞죠?”
“예에… 실례지만 누구신지…?”
“저… 이안씨 친군데요…”
”……!!”
조교들끼리 엠티를 가기로 한 그 해 여름, 수유리로 가기 위해 조교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 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처음 연구실에 그 언니가 나타났을 때, 난 위축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얼핏 봐도 170 가까이 되어 보이는 키에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멋진 몸매, 거기다가 화사한 외모는 칙칙한 연구실을 환히 밝힐 정도였다. 엠티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짧은 분홍빛 원피스는 그녀의 육감적인 곡선미를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웨이브진 그녀의 풍성한 긴 머리결에선 여자인 나도 두근거릴 만한 좋은 향기가 났다.
…나는 그녀에 비하면 키만 비슷한 선머슴 같은 여자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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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가끔 그녀를 볼 때마다 나는 지독한 상실감에 젖어야만 했다.
그녀의 터질 것 같은 여성미와 나의 와일드한 모습을 비교해 가며…
그런 사람들은 종종 남들의 추격 의지 자체를 꺾는 면이 있다.
그래서 그가 하루에 한 번 꼴로 전화를 받으러 연구실 밖으로 나갈 때도, 나는 딱히 질투심을 가질 수조차 없었다.
그녀의 전화를 받는 그의 눈동자는 평소와는 다른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뭐랄까… 그가 정말 관심 있는 책을 읽을 때의 그것이었다.
그 질릴 정도로 황홀한 언니와 그가 헤어진 것은 한 달쯤 전인 것 같다.
오늘은 내게 주어진 기회가 아닐까.
그릇을 치우면서, 나는 마침내 밥 먹는 내내 속으로 되뇌인 말을 꺼냈다.
“오빠 날도 좋은데 영화나 보러 갈래요?”
“어…”
“’내 머리 속의 화이트’ 개봉했던데.”
딱히 멜로영화가 보고 싶다거나, 정우성이 마음에 든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난 그런 식의 감정 표출이 수치스럽다)
마침 생각난 요즘 영화가 그것밖에 없었을 뿐…
그는 문득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선약이 있어서.”
“혹시 딴 여자 만나요?”
“아냐. 그런 거.”
내가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해 참견할 자격은 없다.
하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고 밋밋하게 답한다.
그리곤 그답지 않게 진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한다.
“미안, 은정이가 모처럼 불쌍한 선배 구제해 주려고 했는데.”
“그러게요. 아~아. 공부나 할까.”
……
1시쯤 이안 오빠는 짐을 챙겨 일어났다.
가방을 들고 일어나면서 멋적은 얼굴로 말한다.
“가봐야겠다. 먼저 가서 미안.”
“나중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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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데 가봐야 될 것 같아. 먼저 가서 미안.”
“에~ 그런 게 어딨어~!!”
“여친이랑 먼저 사라지는 거 반칙이에요!!!”
작년 여름 그의 여자친구 혜경을 처음 본 날, 둘은 산 기슭의 민박집에서 자정쯤 먼저 자리를 떴다. 원성이 자자했으나 그는 멋적은 얼굴을 하고 여친과 함께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다음부턴 모든 것이 심드렁했다. 박사과정 선배의 학술적인 얘기도, 가끔 나오는 드라마와 가십성 얘기들도 모두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울했다. 수시로 들이키는 맥주만이 나의 침묵을 정당화해 주었다.
한 20분만에 맥주 두 캔을 비우니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야~ 막내~ 어두운 데 조심해라~”
“누구 같이 가줘야 되는 거 아냐?”
“괜찮아요.”
대학원 선배들의 염려를 뒤로 하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왠지 멀리 떨어져 있는 민박집 공동화장실은 가고 싶지 않았다. 더러울 것은 뻔했고 왠지 무섭기도 했다. 난 근처에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몰래 일을 치룰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거의 눈에 안 뜨일 정도로 후미진 둔덕 곁으로 뭔가 흰색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순간 얼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 흰 빛(사실 분홍색)의 인영…
그건 분명 이안 오빠의 여친, 혜경의 화사한 분홍색 원피스였다.
나는 홀린 듯 소리를 죽이고 그 근처로 향했다.
“아… 으음… 아…”
“헉…헉… 으으…”
역시 예상대로 그 그림자는 그와 그녀였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들이 후미진 숲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는 뻔했다.
“아… 몰라… 어떡해…”
“헉… 혜경아… 좋아…? 응…?”
“앙… 오빠 정말 미쳤어… 어떻게 여기서… 하앙…”
그녀의 몸은 나무에 두 손을 잡고서 간신히 지탱되고 있었고, 분홍빛 원피스는 엉덩이 위로 완전히 말려 올라간 채였다. 이안 오빠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부여잡은 채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퍽… 퍽…)
“헉…허억… 내 말대로… 큭… 짧은 원피스 입고 오길… 잘했지…?”
“학학…아~…워…원래부터… 이럴려구 그런 거였어…? 아히~”
“하하… 이것도… 헉… 색다르고 좋지 않아… 응?”
“아~ 몰라… 아, 아~ 아…”
난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은 채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와 그녀의 하얀 다리가 눈을 찌른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점점 커져 간다.
“아…아~ 아~! 아하… 오빠 나 어떡해… 하앙…”
“어…크윽… 혜경아… 나… 이제…”
그의 허리가 그녀가 쓰러질까 걱정될 정도로 강하게 부딪혀오면서 그녀의 교성이 한 옥타브 정도 올라간다. 아름다운 지체를 푸르르 떠는 그녀.
난 더 이상 그들의 광연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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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아…음…”
그가 연구실을 나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나는 어느 샌가 바지 안에 손을 집어넣어 문지르고 있다.
충격적인 목격을 한 그날 이후, 난 아주 가끔씩이지만 이안 오빠와 혜경, 그들의 그날 밤 모습을 생각하며 마스터베이션을 하곤 했다. 평소의 차분하던 모습과 달리, 욕망에 타오르던 이안 오빠의 실루엣은 충격적이었을 뿐 아니라 너무나 외설스러운 장면이었다.
끝까지 다 보지 못한 그들의 정사는 상상력의 힘을 빌어 내 머리 속에서 끝없이 반복 재생산되었다. 그 상상 속에서 나는 혜경 언니가 되었다가, 이안 오빠가 되었다가를 반복하지만 어인 일인지 나 자신을 대입시키지는 못한다.
“으… …으음!!”
오늘은 평소보다 빨리 젖어버린 것 같다.
왠지 그 때에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흘러내린다.
……
……
오늘도 그는 연구실에서 같은 자세로 책을 읽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가끔 휴대폰을 꺼내본다는 것이었다.
그리곤 작게 한숨을 내쉰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날 때의 그 한숨이다. 뭔가 한심하다는.
잠시 뭔가 생각한 다음 같은 자세로 앉아 문자를 찍는다.
누구한테서 온 문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혜경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문자를 입력하고 있는 그의 눈빛이 그녀와 통화할 때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호기심으로 충만한, 빛나는 눈빛.
그 이후로 혜경으로부터는 연락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단지 통화 대신에 문자로 바뀐 것 뿐.
“어 은정이 왔구나. 마침 잘 됐다. 저녁이나 먹으러 갈래? 내가 쏘지.”
“…….”
그의 건조하지만 따뜻한 목소리.
난 그의 눈을 본다.
밥 먹을 때나 일할 때와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지루하다는 눈빛.
“…죄송해요, 선약이 있어서요.”
……
언제나처럼 또 아침이 왔다.
매서운 찬바람이 코트를 여미게 한다.
이미 낙엽이 사라져버린 거리는 온통 회색으로 덮인 것 같다.
지난 일요일의 화창한 날씨가 마치 잠깐의 환상이었던 것처럼.
나는 무엇을 위해서인지, 또다시 신촌의 일요일 아침 거리를 그렇게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 다 끝나기 전에
그 이름을 불러야 할 텐데
내가 지금 여기 서 있다고
이제 연극이 끝나고 조명이 꺼지면
관객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어느새 난 까맣게 잊혀질 텐데
널 위한 무대 위에서
난 언제나 그냥 지나가는 사람
이름도 없이 대사도 없이
화려한 불빛 아래 서 있는
너의 곁을 잠시 지나가는 사람
운명이 내게 전해준 배역
어떤 사람
- 윤상, ‘어떤사람A’
* 4부는 5부 이후와 전개상 약간 다른 내용이라 먼저 올립니다.
(은정이는 아마 앞으로 나올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 보잘것 없는 글에 생각지도 못한 성원 보내주셔서 놀랐습니다.
가능한한 빨리...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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