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분류
PC방시트콤 - 3부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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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2장 : 부부게이머
나는 철호를 앞세워 지하철 입구로 나갔다. 출근 시간에 쫒기는 사람들에겐 몸을 치대듯 달겨들어 돈을 빼앗고 느긋한 사람들에겐 동정심을 유발해서 깡통에 돈을 채워나갔다.
"이 짓거리 왜 하나 했더니 솔찬네."
"그봐예 행님, 돈 있으니 든든하제."
"말 나온 김에 국밥이나 한 그릇 먹을까?"
"하모, 쓰레기통 뒤져 먹던 꼬라지가 엄청 용 됐구만."
"오백원짜리 동전한잎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다닌단 얘길 듣고 미친짓꺼리들 한다 싶었다."
"행님두 이젠 돈 좋은건 아시겠수?"
"아다마다, 어젠 돈 때문에 때 빼구 광냈잖냐."
"근데 돈 어디서 나서 맥주까지 마셨수?"
"응, 그 죽돌이라는 김동수 갸가 주더라."
"그쟈슥은 돈 줄라면 나를 줄것이지."
"글쎄다, 돈 맛 제대로 아는 네놈에겐 돌아갈 돈이 없나보다."
큰 길가의 해장국집에서 버젓이 돈 내고 나서며 입술을 훔쳐 본 적이 얼마만인지 모른다.
철호와 함께 있으면 만사태평이던 엊그제 일과 달리 요즘 들어선 매사가 불만에 쌓여있다. 돈 없어도 모든 것이 해결되던 지난 날엔 추위에 오돌오돌 떠는 육신을 보듬어 안아주는 일만이 생활의 전부였다면 몇 푼 챙기는 방법을 깨달은 지금에 와선 오히려 돈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머리 속에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는 듯 했다.
이러한 생각이 철호놈에겐 조금 일찍왔을 뿐이지만 뭔가 집착하기 시작하면 끝장을 봐 버리는 내게 있어서는 어쩌면 치명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다 줄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
"야, 철호야, 거렁뱅이 짓꺼리 말구 돈 벌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겠냐?"
"뭐예, 겨우 이틀하구 벌써 지친거요?"
"지쳤다기 보담 할 짓이 아니라고 십년을 고생하며 살았는데 새삼 이틀하며 너무 세상을 편히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서서 그래."
"어휴, 이삼십분만 철판 깔면 이 짓꺼리 백년이라도 하겠구만."
"암튼 난 못하겠다. 그렇다고 여태 해오던 대로 쓰레기통두 뒤질 생각없구."
"그럼 곡기 끊겠다는거유? 아님 내 혼자 다 벌어 먹여살리란 거유?"
"몰라, 일단 돈 맛을 알아버렸으니 뭘 해서든 쓰레기통 뒤지긴 텃구, 깔끔도 떨어봤으니 철판깔구 거렁뱅이짓 하기두 싫어졌으니 큰일이다."
"암튼 행님은 나이를 먹어도 헛 먹구 인생이란 개기며 살다 가는거라던 개똥철학은 또 어디 묻어놨수?"
빈 하늘엔 먹구름이 끼더니 눈발을 살살 뿌리고 있다. 햇살이 감춰지자 겨우 따뜻해지던 아침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어디라도 급히 추위를 피할 곳으로 가야겠다 싶었다.
"철호야, 지하루 내려가자. 아무래도 몸살 나려는가 보다."
"머 행님두 밤새 지랄을 떨었구만. 코피는 안 터졌수?"
"그 까진 아닌데두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춥지 않다냐."
"아따, 그럼 돈있구 한데 감기약이라두 한 사발 마시구 PC방에가서 몸 좀 녹이면 되지 뭘루 지긋지긋한 거적데기 속을 또 찾으려는거요."
"그래, 그래. 어서 PC방이라두 들어가자."
철호에게 이끌리다 시피 다시 PC방을 찾았다. 아직 겨울방학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제법 북적거리는 시간이다. 문주라는 친구의 붙박이 자리엔 덩그런히 재떨이만 놓인 채 아직 빈자리다. 김동수는 아직 영숙이라는 여자를 품은 채 모텔방을 전전하고 있는 듯 했다.
밤새도록 경현이란 아일 안고 와서 게임에 빠졌던 부부도 그럭저럭 화해를 하고 싸움을 그쳤는지 자리에 없다.
"행님, 오늘은 내 옆에 앉아서 컴퓨터 좀 차근히 배우시우."
"어, 그래. 어젠 얼빠지게 미르란 게임을 했잖냐. 그거 뭐 어깨만 뻐근한게 마우스 누르던 팔목만 시큰하고 영양가 없는 것 같더라."
"아, 그러니까 누가 행님보고 겜 배우라 했수. 그냥 추운 날엔 PC방이 젤 따땃하고 좋으니까 푹 쉬라고 데려온건데 미쳤다니까."
"그래두 넌 채팅인가 뭔가 해서 미망인 건지구, 난 게임인가 뭔가 해서 따땃한 방에서 목욕까지 하지 않았냐."
"그게 맨날 있는 일 아니잖수. 행님 눈 똥그랗게 만든 이 놈의 컴퓨터나 공부하시라구예."
"알았다, 알았어. 내 컴퓨터란 놈 빠삭하게 공불해야 겠구만."
철호는 채팅 속으로 빠져들었는지 더 이상 내 말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여름 날 떨어지는 소낙비처럼 주르르 쏟아지는 글짜를 보며 히히거리고 죽어라 키보드를 두들겨 패며 글짜를 만들고 있다. 어제 하던 게임을 하려고 암만 화면을 마우스로 더퉈봐도 원하는 화면이 나오지 않는다.
"거참, 문준간 뭔가 하는 친구는 금방 게임화면을 꺼내더만 우라질 뭘 눌러야 되는거야?"
"행님요, 뭘 할긴데?"
"미르, 어제 종일 하던거 말야."
"아쓰블, 행님 컴퓨터엔 계정이 없나보네."
"계정이 뭐꼬?"
"PC방에서 돈 미리 내구 그래야 겜이 된다니까예."
"그럼 이 컴퓨턴 안되는기가."
"함 물어봅시더." 철호는 고개를 쑥 내밀더니 주인을 손 짓으로 불렀다.
"아저씨, 미르 안되여?"
"어디?"
"울 행님 컴퓨터에 미르 안된다카네."
"애이 거 안됩니다. 미른 저 쪽 자리만 되는데. 자릴 옮겨서 해보시우."
"거긴 애들이 다 찼는데 뭘 어쩌라구?"
"애들은 좀 기다리면 자리 날껍니다."
"할 줄 아는게 그 밖에 없는데 그럼 난 뭘 하라구?"
"커피 한잔 서비스로 줄테니까 마시면서 잠시만 기다리슈."
PC방 주인이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고 있다. 그제 그렇게 악을 쓰며 쫒아낸 놈들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은 손수 커피까지 뽑아다 바치는 것을 보니 세상 사는 것이 요지경이라지만 돈 때문에 울고 돈 때문에 웃는다는 노랫말이 결코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쥔 양반, 장사 잘되네." 커피를 받아 훌쩍 한 모금 넘기며 말했다.
"잘되면 뭐합니까. 수지가 안맞는데."
"머리수 곱하기 오백원이면 우와 한시간에 이만원 버는거 아뉴. 하루 스물네시간이니까 사십팔만원이구 한달이면 천오백만원, 우와 금방 부자되겠구만."
"허허, 종일 꽉차야 말이지요. 반짝 애들 오면 붐비지만 썰물 빠지듯 나가버리면 고작 열댓명으로 밤새 컴퓨터가 돌아가니 맨날 적잡니다."
"그럼 차라리 호프집이나 하지 그러슈."
"경기가 안좋아서 뭔 일을 하든 신나는 사람이 없어요."
"쥔 양반 말구 젊은 애두 있던데 누구요?"
"아 걔, 알바지 누구겠수."
"그 놈 오뉴월 닭같이 꾸벅 졸기만 하던데 돈 받고 조는 거유?"
"졸아요? PC방 안지키고 존단말이죠?"
"내가 몇일 봤는데, 걔가 잠자루 왔나보다 싶었는걸."
"저런, 우라질."
"난 쥔장 아들놈인가 했지. 좀 얼빵해 보이는게 보릿자루 같아서 아닌가 싶기도 했구."
"그 딴놈을 아들로 둘 리가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알바놈이 졸면 심야장사는 다 망치는데 이를 어쩌지?"
"확 갈아뿌리면 되지 뭘 고민하슈?"
"이렇게 알바가 뭘하는지 알려주는 손님이 없으니 맨날 허당이라 속만 탔다구요."
"난 뭐 꼰지르려고 말하는게 아니었수. 그냥 일할라면 화끈하게 하고 안할라면 방구석에 쳐박혀 잘 일이지 꿔다논 보리자루마냥 자리만 지키면서 제 할 일도 않는 걸 보며 쥔 양반 속 까맣게 타버렸겠다는 생각에 말하는거유."
"나이 진득한 사람이 일은 잘하는데, 그런 사람을 구할 길이 있나."
"알바란게 특별한 기술이 있어야 하는거유?"
"컴퓨터를 조금 알면 도움이 되구 몰라도 겜만 조금 알면 되니까 아무나 됩니다."
"그럼 그 쟈슥 확 짤라 버리구 대신 내가 몇일 해 드릴까?"
"나이가 지긋 하신데 힘든 일 하실 수 있겠습니까?"
"먹을 만큼 먹었는데 뭐가 힘든일이고 뭐가 쉬운일인지는 훤히 안다우. 그까짓 알바 일이라면 식은 죽 먹기우."
"한시간에 이천오백원인데 우리PC방은 장사가 잘 안되서 이천원 겨우 쳐줍니다. 그래선지 조금 성실한 애들은 모두 딴 PC방 알바를 하고 여기는 아무래도 조금 쳐진 애들이 오질 않았나 싶어요."
"난 삼십분에 삼만원 못 벌어도 한시간이면 오만원은 버는데..."
"헉, 뭘 하시는 분인데 그렇게 많이 벌죠?"
"노하우가 있어야 하지."
"한시간에 오만원이면 하루 여덟시간 사십만원에 한달이면 천이백만원이구 노는날 빼더라도 팔구백만원은 번다는 얘기 아닙니까."
"글세,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잖소. 돈 버는 방법을 깨닭는데만 십년이란 세월을 보냈수."
"밑천이 많이 듭니까?"
"아니우. 그냥 맨 몸으로 버는 돈이 그렇단 얘기요."
"컥, 더 벌수도 있단 말이잖습니까?"
"대충 거기까지만 내가 발설할 수있수. 더 이상 알면 다치니까."
"알았습니다. 워낙 검소해 보여서 그렇게 돈 많은 분인 줄 몰랐습니다."
"해서 하는 얘긴데, 밤중 알바란 놈이 개판인 듯 싶으니까 내가 몇일 그 놈 대신 자릴 메꿔보겠수."
"애구, 전 한시간에 오만원씩 줄 형편이 안되죠. 겨우 이천원이구 심야는 야식비루 삼천원 더 쳐주니까 열시간 일하구 이만삼천원이 고작인걸요."
"아, 글쎄 내가 컴퓨터두 배울 겸 몇일 일해 본다잖수."
"똘똘한 알바 구할 때까지만 그래 준다면 영광이죠."
"난 돈에 관심이 없었는데, 쥔 양반이랑 얘길 하다보니 나도 돈 많이 버는 축에 끼는구먼."
"그럼요, 한달 팔구백 벌면 중산층은 훨씬 넘는겁니다."
"그럼 내 오늘 밤부터 몇일 PC방을 봐주면서 돈 팡팡 벌게 해줄테니까 쥔 양반두 손님들 써비스 팍팍 늘리구 돈 벌 수 있는 방편을 찾아보슈."
"어떻게 하면 될까요? 요금을 팍 내려서 딴 집 다 쓸어지면 그땐 돈 벌줄 알구 오백원으로 내렸는데두 더 어렵긴 마찬가지니."
"역발산이라잖수. 여태 하던 생각을 바꿔보슈."
"그럼, 요금을 올리라구요?"
"내려서 안되면 올리면 될 것 아뉴."
"말이 쉽지 한번 내린 걸 올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낮엔 오백원 받구, 내가 알바할 땐 천원받아줄테니 그럼 되겠수?"
"밤엔 더 깍아 달라구 하는데 꺼꾸러 올려 받겠다구요?"
"대신, 내가 일하는 동안엔 쥔 양반 얼씬두 하지마슈. 내 방식대루 돈 많이 벌어줄테니까."
"꼭 우렁각시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야 믿질 것 없으니 함 해보죠."
"힘들어서 오랜 못하니까 똘똘한 알바 빨리 챙기는 것 약속하슈."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알바라구 생각말구 몇일동안만 동업자라구 생각하며 믿어보슈."
"그래두 성함이나 알고 있어야."
"김 갑수요. 쥔 양반만 빼곤 이 근처에서 내 이름 석자 모르는 사람이 없수."
"고맙습니다.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꿔서라도 적자는 메꿔야할텐데..."
미른가 뭔가 되는 자리에서 꼬마 하나가 게임을 끝내고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면 주저리 주저리 PC방 주인과 계속 얘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빈 자리로 걸어가는 길에 철호가 허리께를 쿡 찌르며 물었다.
"행님요, 뭔 얘길 길게 하셨수?"
"어, 사업 얘기."
"행님이 뭔 사업?"
"알바놈 말야. 너무 성의가 없었잖냐. 갈아치우고 내가 그 자릴 몇일 하기루 했다."
"컥, 그럼 행님이 알바?"
"알바라기 보담 동업자루 몇일 봐줄라칸다."
"난 공짜루 알밤 까두 행님이 뭐라 않겠네."
"그지 발싸게 같은 소리마라. 내가 일할 땐 공짜 없다."
"그럼 난 뭐유. 행님은 밤새면 돈 생기는데 난 밤새면 돈 내란 말이유?"
"당연하제. 넌 손님. 난 쥔이니까."
철호의 처연한 웃음을 뒤로 한 채 빈 자리에 앉은 나는 우선 인터넷을 열었다. 검색창에다 PC방, 관리, 돈 버는 법 등등 사전에 알아두면 좋을 것 같은 말을 생각나는대로 마구 쳐대기 시작했다. 어떤 경험에 의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모른다. 남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것을 만드는 방법은 익숙해 있었다. 어쩌면 나는 경험과 경험에 의해 이어진 끈에 연결된 하나의 객체인지도 모르겠다.
"어, 아저씨 먼저 오셨네." 한참 인터넷을 검색하는 중에 김동수가 옆 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그래, 영숙이랑 재미 좋았어?"
"아휴, 걘 죽여요. 한번 물면 쫄아들때까지 놔주질 않는다구요."
"난 돈 모자라서 내 주머니까지 다 털렸었지."
"명희년이 그렇게 많이 마셨어요?"
"끝엔 자넬 떠나겠다며 훌쩍 가버렸지."
"잘했어요. 고년땜에 맘 고생 엄청 심했걸랑요."
"뭔 맘고생?"
"자꾸 이혼하라구 압박하잖아요, 마누라랑 갈라설 만큼 눈에 들지도 않는데."
"영숙이란 여자는 압박 안하나보지?"
"걘 쫄깃한 맛이 끝내줘서 남주긴 아깝지만 결국 내 차진 안될꺼에요."
"동네 놈들이 모두 동선가보군?"
"침발라놔도 언제 꼬리치구 내 뺄지 감당하기 어려운 애죠."
"쫄깃한 맛 땜에 애 엄말 멀리하면 어떻해?"
"영희엄마만 죽자살자 쫒아다니다 결혼한거라 도망 못갈껄요?"
"자신만만으로 되는게 아냐. 마음이 있다면 표현해서 다독여야지."
"도망가면 또 딴 년 생길텐데 뭐."
"미련도 있고 미움도 있구먼."
"겜방 죽돌이의 인생이란 그런거죠."
"딴 일을 찾아보지 그래?"
"이 것도 나이가 있다니까요. 안해 본게 없어요. 이거 수입이 짭짤해서 딴일도 못하구요."
"몸은 힘들더라도 생산적인걸 찾아봐야지."
"아저씨두 생산적이지 않을 것 같은데 남 일에 넘 신경쓰지마시죠."
"그렇게 보였다면 할 말 없군."
"쿠리한 냄새가 진동하던데 오늘은 어찌 깔금하네요."
"자네 코에도 비누 냄새가 났나?"
"그럼요. 제 코는 뭐 코딱지루만 꽉 막혔을라구요."
나는 철호를 앞세워 지하철 입구로 나갔다. 출근 시간에 쫒기는 사람들에겐 몸을 치대듯 달겨들어 돈을 빼앗고 느긋한 사람들에겐 동정심을 유발해서 깡통에 돈을 채워나갔다.
"이 짓거리 왜 하나 했더니 솔찬네."
"그봐예 행님, 돈 있으니 든든하제."
"말 나온 김에 국밥이나 한 그릇 먹을까?"
"하모, 쓰레기통 뒤져 먹던 꼬라지가 엄청 용 됐구만."
"오백원짜리 동전한잎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다닌단 얘길 듣고 미친짓꺼리들 한다 싶었다."
"행님두 이젠 돈 좋은건 아시겠수?"
"아다마다, 어젠 돈 때문에 때 빼구 광냈잖냐."
"근데 돈 어디서 나서 맥주까지 마셨수?"
"응, 그 죽돌이라는 김동수 갸가 주더라."
"그쟈슥은 돈 줄라면 나를 줄것이지."
"글쎄다, 돈 맛 제대로 아는 네놈에겐 돌아갈 돈이 없나보다."
큰 길가의 해장국집에서 버젓이 돈 내고 나서며 입술을 훔쳐 본 적이 얼마만인지 모른다.
철호와 함께 있으면 만사태평이던 엊그제 일과 달리 요즘 들어선 매사가 불만에 쌓여있다. 돈 없어도 모든 것이 해결되던 지난 날엔 추위에 오돌오돌 떠는 육신을 보듬어 안아주는 일만이 생활의 전부였다면 몇 푼 챙기는 방법을 깨달은 지금에 와선 오히려 돈으로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머리 속에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는 듯 했다.
이러한 생각이 철호놈에겐 조금 일찍왔을 뿐이지만 뭔가 집착하기 시작하면 끝장을 봐 버리는 내게 있어서는 어쩌면 치명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다 줄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
"야, 철호야, 거렁뱅이 짓꺼리 말구 돈 벌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겠냐?"
"뭐예, 겨우 이틀하구 벌써 지친거요?"
"지쳤다기 보담 할 짓이 아니라고 십년을 고생하며 살았는데 새삼 이틀하며 너무 세상을 편히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서서 그래."
"어휴, 이삼십분만 철판 깔면 이 짓꺼리 백년이라도 하겠구만."
"암튼 난 못하겠다. 그렇다고 여태 해오던 대로 쓰레기통두 뒤질 생각없구."
"그럼 곡기 끊겠다는거유? 아님 내 혼자 다 벌어 먹여살리란 거유?"
"몰라, 일단 돈 맛을 알아버렸으니 뭘 해서든 쓰레기통 뒤지긴 텃구, 깔끔도 떨어봤으니 철판깔구 거렁뱅이짓 하기두 싫어졌으니 큰일이다."
"암튼 행님은 나이를 먹어도 헛 먹구 인생이란 개기며 살다 가는거라던 개똥철학은 또 어디 묻어놨수?"
빈 하늘엔 먹구름이 끼더니 눈발을 살살 뿌리고 있다. 햇살이 감춰지자 겨우 따뜻해지던 아침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어디라도 급히 추위를 피할 곳으로 가야겠다 싶었다.
"철호야, 지하루 내려가자. 아무래도 몸살 나려는가 보다."
"머 행님두 밤새 지랄을 떨었구만. 코피는 안 터졌수?"
"그 까진 아닌데두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춥지 않다냐."
"아따, 그럼 돈있구 한데 감기약이라두 한 사발 마시구 PC방에가서 몸 좀 녹이면 되지 뭘루 지긋지긋한 거적데기 속을 또 찾으려는거요."
"그래, 그래. 어서 PC방이라두 들어가자."
철호에게 이끌리다 시피 다시 PC방을 찾았다. 아직 겨울방학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제법 북적거리는 시간이다. 문주라는 친구의 붙박이 자리엔 덩그런히 재떨이만 놓인 채 아직 빈자리다. 김동수는 아직 영숙이라는 여자를 품은 채 모텔방을 전전하고 있는 듯 했다.
밤새도록 경현이란 아일 안고 와서 게임에 빠졌던 부부도 그럭저럭 화해를 하고 싸움을 그쳤는지 자리에 없다.
"행님, 오늘은 내 옆에 앉아서 컴퓨터 좀 차근히 배우시우."
"어, 그래. 어젠 얼빠지게 미르란 게임을 했잖냐. 그거 뭐 어깨만 뻐근한게 마우스 누르던 팔목만 시큰하고 영양가 없는 것 같더라."
"아, 그러니까 누가 행님보고 겜 배우라 했수. 그냥 추운 날엔 PC방이 젤 따땃하고 좋으니까 푹 쉬라고 데려온건데 미쳤다니까."
"그래두 넌 채팅인가 뭔가 해서 미망인 건지구, 난 게임인가 뭔가 해서 따땃한 방에서 목욕까지 하지 않았냐."
"그게 맨날 있는 일 아니잖수. 행님 눈 똥그랗게 만든 이 놈의 컴퓨터나 공부하시라구예."
"알았다, 알았어. 내 컴퓨터란 놈 빠삭하게 공불해야 겠구만."
철호는 채팅 속으로 빠져들었는지 더 이상 내 말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여름 날 떨어지는 소낙비처럼 주르르 쏟아지는 글짜를 보며 히히거리고 죽어라 키보드를 두들겨 패며 글짜를 만들고 있다. 어제 하던 게임을 하려고 암만 화면을 마우스로 더퉈봐도 원하는 화면이 나오지 않는다.
"거참, 문준간 뭔가 하는 친구는 금방 게임화면을 꺼내더만 우라질 뭘 눌러야 되는거야?"
"행님요, 뭘 할긴데?"
"미르, 어제 종일 하던거 말야."
"아쓰블, 행님 컴퓨터엔 계정이 없나보네."
"계정이 뭐꼬?"
"PC방에서 돈 미리 내구 그래야 겜이 된다니까예."
"그럼 이 컴퓨턴 안되는기가."
"함 물어봅시더." 철호는 고개를 쑥 내밀더니 주인을 손 짓으로 불렀다.
"아저씨, 미르 안되여?"
"어디?"
"울 행님 컴퓨터에 미르 안된다카네."
"애이 거 안됩니다. 미른 저 쪽 자리만 되는데. 자릴 옮겨서 해보시우."
"거긴 애들이 다 찼는데 뭘 어쩌라구?"
"애들은 좀 기다리면 자리 날껍니다."
"할 줄 아는게 그 밖에 없는데 그럼 난 뭘 하라구?"
"커피 한잔 서비스로 줄테니까 마시면서 잠시만 기다리슈."
PC방 주인이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고 있다. 그제 그렇게 악을 쓰며 쫒아낸 놈들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은 손수 커피까지 뽑아다 바치는 것을 보니 세상 사는 것이 요지경이라지만 돈 때문에 울고 돈 때문에 웃는다는 노랫말이 결코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쥔 양반, 장사 잘되네." 커피를 받아 훌쩍 한 모금 넘기며 말했다.
"잘되면 뭐합니까. 수지가 안맞는데."
"머리수 곱하기 오백원이면 우와 한시간에 이만원 버는거 아뉴. 하루 스물네시간이니까 사십팔만원이구 한달이면 천오백만원, 우와 금방 부자되겠구만."
"허허, 종일 꽉차야 말이지요. 반짝 애들 오면 붐비지만 썰물 빠지듯 나가버리면 고작 열댓명으로 밤새 컴퓨터가 돌아가니 맨날 적잡니다."
"그럼 차라리 호프집이나 하지 그러슈."
"경기가 안좋아서 뭔 일을 하든 신나는 사람이 없어요."
"쥔 양반 말구 젊은 애두 있던데 누구요?"
"아 걔, 알바지 누구겠수."
"그 놈 오뉴월 닭같이 꾸벅 졸기만 하던데 돈 받고 조는 거유?"
"졸아요? PC방 안지키고 존단말이죠?"
"내가 몇일 봤는데, 걔가 잠자루 왔나보다 싶었는걸."
"저런, 우라질."
"난 쥔장 아들놈인가 했지. 좀 얼빵해 보이는게 보릿자루 같아서 아닌가 싶기도 했구."
"그 딴놈을 아들로 둘 리가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알바놈이 졸면 심야장사는 다 망치는데 이를 어쩌지?"
"확 갈아뿌리면 되지 뭘 고민하슈?"
"이렇게 알바가 뭘하는지 알려주는 손님이 없으니 맨날 허당이라 속만 탔다구요."
"난 뭐 꼰지르려고 말하는게 아니었수. 그냥 일할라면 화끈하게 하고 안할라면 방구석에 쳐박혀 잘 일이지 꿔다논 보리자루마냥 자리만 지키면서 제 할 일도 않는 걸 보며 쥔 양반 속 까맣게 타버렸겠다는 생각에 말하는거유."
"나이 진득한 사람이 일은 잘하는데, 그런 사람을 구할 길이 있나."
"알바란게 특별한 기술이 있어야 하는거유?"
"컴퓨터를 조금 알면 도움이 되구 몰라도 겜만 조금 알면 되니까 아무나 됩니다."
"그럼 그 쟈슥 확 짤라 버리구 대신 내가 몇일 해 드릴까?"
"나이가 지긋 하신데 힘든 일 하실 수 있겠습니까?"
"먹을 만큼 먹었는데 뭐가 힘든일이고 뭐가 쉬운일인지는 훤히 안다우. 그까짓 알바 일이라면 식은 죽 먹기우."
"한시간에 이천오백원인데 우리PC방은 장사가 잘 안되서 이천원 겨우 쳐줍니다. 그래선지 조금 성실한 애들은 모두 딴 PC방 알바를 하고 여기는 아무래도 조금 쳐진 애들이 오질 않았나 싶어요."
"난 삼십분에 삼만원 못 벌어도 한시간이면 오만원은 버는데..."
"헉, 뭘 하시는 분인데 그렇게 많이 벌죠?"
"노하우가 있어야 하지."
"한시간에 오만원이면 하루 여덟시간 사십만원에 한달이면 천이백만원이구 노는날 빼더라도 팔구백만원은 번다는 얘기 아닙니까."
"글세,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잖소. 돈 버는 방법을 깨닭는데만 십년이란 세월을 보냈수."
"밑천이 많이 듭니까?"
"아니우. 그냥 맨 몸으로 버는 돈이 그렇단 얘기요."
"컥, 더 벌수도 있단 말이잖습니까?"
"대충 거기까지만 내가 발설할 수있수. 더 이상 알면 다치니까."
"알았습니다. 워낙 검소해 보여서 그렇게 돈 많은 분인 줄 몰랐습니다."
"해서 하는 얘긴데, 밤중 알바란 놈이 개판인 듯 싶으니까 내가 몇일 그 놈 대신 자릴 메꿔보겠수."
"애구, 전 한시간에 오만원씩 줄 형편이 안되죠. 겨우 이천원이구 심야는 야식비루 삼천원 더 쳐주니까 열시간 일하구 이만삼천원이 고작인걸요."
"아, 글쎄 내가 컴퓨터두 배울 겸 몇일 일해 본다잖수."
"똘똘한 알바 구할 때까지만 그래 준다면 영광이죠."
"난 돈에 관심이 없었는데, 쥔 양반이랑 얘길 하다보니 나도 돈 많이 버는 축에 끼는구먼."
"그럼요, 한달 팔구백 벌면 중산층은 훨씬 넘는겁니다."
"그럼 내 오늘 밤부터 몇일 PC방을 봐주면서 돈 팡팡 벌게 해줄테니까 쥔 양반두 손님들 써비스 팍팍 늘리구 돈 벌 수 있는 방편을 찾아보슈."
"어떻게 하면 될까요? 요금을 팍 내려서 딴 집 다 쓸어지면 그땐 돈 벌줄 알구 오백원으로 내렸는데두 더 어렵긴 마찬가지니."
"역발산이라잖수. 여태 하던 생각을 바꿔보슈."
"그럼, 요금을 올리라구요?"
"내려서 안되면 올리면 될 것 아뉴."
"말이 쉽지 한번 내린 걸 올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낮엔 오백원 받구, 내가 알바할 땐 천원받아줄테니 그럼 되겠수?"
"밤엔 더 깍아 달라구 하는데 꺼꾸러 올려 받겠다구요?"
"대신, 내가 일하는 동안엔 쥔 양반 얼씬두 하지마슈. 내 방식대루 돈 많이 벌어줄테니까."
"꼭 우렁각시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야 믿질 것 없으니 함 해보죠."
"힘들어서 오랜 못하니까 똘똘한 알바 빨리 챙기는 것 약속하슈."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알바라구 생각말구 몇일동안만 동업자라구 생각하며 믿어보슈."
"그래두 성함이나 알고 있어야."
"김 갑수요. 쥔 양반만 빼곤 이 근처에서 내 이름 석자 모르는 사람이 없수."
"고맙습니다.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꿔서라도 적자는 메꿔야할텐데..."
미른가 뭔가 되는 자리에서 꼬마 하나가 게임을 끝내고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면 주저리 주저리 PC방 주인과 계속 얘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빈 자리로 걸어가는 길에 철호가 허리께를 쿡 찌르며 물었다.
"행님요, 뭔 얘길 길게 하셨수?"
"어, 사업 얘기."
"행님이 뭔 사업?"
"알바놈 말야. 너무 성의가 없었잖냐. 갈아치우고 내가 그 자릴 몇일 하기루 했다."
"컥, 그럼 행님이 알바?"
"알바라기 보담 동업자루 몇일 봐줄라칸다."
"난 공짜루 알밤 까두 행님이 뭐라 않겠네."
"그지 발싸게 같은 소리마라. 내가 일할 땐 공짜 없다."
"그럼 난 뭐유. 행님은 밤새면 돈 생기는데 난 밤새면 돈 내란 말이유?"
"당연하제. 넌 손님. 난 쥔이니까."
철호의 처연한 웃음을 뒤로 한 채 빈 자리에 앉은 나는 우선 인터넷을 열었다. 검색창에다 PC방, 관리, 돈 버는 법 등등 사전에 알아두면 좋을 것 같은 말을 생각나는대로 마구 쳐대기 시작했다. 어떤 경험에 의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모른다. 남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것을 만드는 방법은 익숙해 있었다. 어쩌면 나는 경험과 경험에 의해 이어진 끈에 연결된 하나의 객체인지도 모르겠다.
"어, 아저씨 먼저 오셨네." 한참 인터넷을 검색하는 중에 김동수가 옆 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그래, 영숙이랑 재미 좋았어?"
"아휴, 걘 죽여요. 한번 물면 쫄아들때까지 놔주질 않는다구요."
"난 돈 모자라서 내 주머니까지 다 털렸었지."
"명희년이 그렇게 많이 마셨어요?"
"끝엔 자넬 떠나겠다며 훌쩍 가버렸지."
"잘했어요. 고년땜에 맘 고생 엄청 심했걸랑요."
"뭔 맘고생?"
"자꾸 이혼하라구 압박하잖아요, 마누라랑 갈라설 만큼 눈에 들지도 않는데."
"영숙이란 여자는 압박 안하나보지?"
"걘 쫄깃한 맛이 끝내줘서 남주긴 아깝지만 결국 내 차진 안될꺼에요."
"동네 놈들이 모두 동선가보군?"
"침발라놔도 언제 꼬리치구 내 뺄지 감당하기 어려운 애죠."
"쫄깃한 맛 땜에 애 엄말 멀리하면 어떻해?"
"영희엄마만 죽자살자 쫒아다니다 결혼한거라 도망 못갈껄요?"
"자신만만으로 되는게 아냐. 마음이 있다면 표현해서 다독여야지."
"도망가면 또 딴 년 생길텐데 뭐."
"미련도 있고 미움도 있구먼."
"겜방 죽돌이의 인생이란 그런거죠."
"딴 일을 찾아보지 그래?"
"이 것도 나이가 있다니까요. 안해 본게 없어요. 이거 수입이 짭짤해서 딴일도 못하구요."
"몸은 힘들더라도 생산적인걸 찾아봐야지."
"아저씨두 생산적이지 않을 것 같은데 남 일에 넘 신경쓰지마시죠."
"그렇게 보였다면 할 말 없군."
"쿠리한 냄새가 진동하던데 오늘은 어찌 깔금하네요."
"자네 코에도 비누 냄새가 났나?"
"그럼요. 제 코는 뭐 코딱지루만 꽉 막혔을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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