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홍색 단검 - 7부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1 조회
- 0 추천
- 0 비추천
-
목록
본문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빛 물론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인 만큼 바람은 더욱 차가워졌으나 검 휘두르기 동작을 마친 나는 온 몸에 땀이 송송 배일 정도로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훈련 과정은
검 3천 번 휘두르기에서 다른 자세 교정으로 바뀌어 있었고 덕분에 휴식시간이 중간중간 꽤 주어졌다. 자리에 앉은 채로 이젠 묵직함이라곤 별로 느껴지지 않는 연습용 검을 매만지는
내게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내 또래의 다른 훈련생이 옆에 앉는 중이었다.
“샤로프..................................................”
“여어... 로키... 이젠 제법 기사 폼이 나던데?.................................................”
나는 그냥 피식 웃어버렸고 샤로프라 불린 그 녀석은 수통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도 나만큼이나 땀에 절어 있었다.
“요사이 좋은 일이 있나 봐?... 검에 아주 기합이 들어가있던데?................................”
“무슨... 저 교관은 훈련에 임하는 자세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점수에 반영하기 때문에 최대한 열심히 하는 척 해야지............................”
그날 밤의 일 이후로 나와 유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우리는 마치 결혼한 사이처럼 아주 작은 볼일도 같이 다니곤 했다. 예전처럼 늘 훈련이 끝나면 그녀는 본래 기다리던
장소에서 마중 나와있었다. 그러면 나는 한껏 상쾌한 기분으로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아주곤 했다. 길거리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질겁하기도 했지만 그녀도 은근히 남들에게 그런 우리
사이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듯했다.
유피와 시장을 보거나 동네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개울가에서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기 일쑤였다. 무슨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우리는 늘 해가 저물어서야
헤어졌고 작별의 키스를 할 때마다 그녀는 얼굴을 아주 살포시 붉히며 나를 사랑한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 눈빛을 받은 나는 집에 가서도 항상 마음 속 한 가득 들어찬 기분을 느끼며
편안하고 달콤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래그래... 열심히 하는 척.............................................”
어째서인지 ‘척’에 힘을 주어 발음하며 내게 수통을 권하는 샤로프. 녀석은 앞서 그런 척을 못하고 교관에게 질타를 받았던 훈련 초기의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반쯤 남아있는
수통을 들이켰고 샤로프는 주변에 떨어진 자갈 몇 개를 들고 장난을 치더니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엘븐 포레스트 소식 들었어?... 야... 그거 신기하지 않냐?.......................................”
“음?... 무슨 소식?.............................................”
그리 널리 알려진 소식은 아니었는지 내가 모른다고 해도 샤로프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여전히 자갈을 굴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지나가는 음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청하게
되었다. ‘엘븐 포레스트’란 명칭에 신경을 꺼두고 있던 예전의 일이 상기됐기 때문이었다.
“엘프를 찾는다고 하던데 말야... 뭐 엘프가 본래 용모가 빼어나긴 하지만... 그 찾는다는 여자 엘프는 특별히 예뻤나 봐... 엘븐 포레스트 내에서도 꽤나 각광을 받았던 모양인데... 씁...”
“그거 대단한걸...............................................”
나는 녀석의 얼굴에 ‘쭉쭉빵빵한 여자 엘프랑 한 번 자봤으면’ 하는 바람이 노골적으로 피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애써 키득거림을 참았다. 샤로프는 내 예의상의 반응이 맘에 들었는지
본론을 구체적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도 이 마을을 방문했던 엘프 무리들 기억나지?... 왜... 그 있잖아... 입구쪽 경비병에게 서류를 건네주며 뭔가 얘기하던 대여섯 명의 엘프들..............................”
나 또한 남자 엘프든 여자 엘프든 거의 단독으로 다니던 평소의 모습에 비하면 조금은 이질적이었기에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어서 그냥 교역차
들렀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꽤 왕성한 샤로프는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기어코 알아낸 모양이었다.
“아까 말했던 그 여자 엘프가 좀 다른 방향으로도 대단했던 모양이야... 학식은 물론 무술에도 능해서 각종 대회에서 상을 쓸고 다녔대... 거기다가... 어찌나 마음씨 좋고 친절한지...
인간 마을 쪽으로도 뭔가 큰 거래가 있을 시 그녀를 동반하면 이미지가 좋게 박혀서 거래도 잘 성립이 됐다고 하더라고.................................”
“과연... 각광받을 만하군......................................................”
나는 수통의 남은 물을 들이키며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이 그의 칭송에 적당히 반응하며 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나온 얘기는 내 뇌리를 살포시 스쳐가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끼게 했다.
“특히... 그녀는 단검을 잘 쓴다던데................................................”
“단검?..............................................................”
살짝 끝의 음성을 높이는 내게서 샤로프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어때?... 내 정보력 대단하지?...’ 라고 자랑하는 포즈를 취했다. 그러나 내가 의문감을 표현한 건 단검이란
단어에서였다. 단검을 쓰는 사람들은 대체로 손가락이 예민하다. 정확히 목표물에 명중하거나 재빠르게 상대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예사롭지 않은 감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째선지 그런 예민한 손길과 내가 만났던 여자 엘프의 모습이 교차되듯 머릿속을 지나감을 느꼈다. 샤로프는 다시 먼산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갈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가 뭔 일을 저질렀는지 갑자기 엘븐 포레스트 전역을 발칵 뒤집히게 만들었던 모양이야... 그리고는 도망쳤다는데.......................................”
“그것 때문에 엘프들이 찾으러 왔나 보군... 혹시... 이 마을에도 들렀나 해서................................................”
“그랬겠지... 하지만 별 소득 없을 거야... 인간들은 본래 엘프들의 사건에 별로 신경을 안 쓰잖아?... 인간과 교류를 한다고는 하지만 종족 자체가 다른 만큼 서로의 사건에 하등 관계없는
일이 대부분이고... 무슨 일을 처리해준다 해도 보수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으니까... 뭐... 나같이 시시콜콜한 기사거리까지 다 살펴보는 타입이 아닌 이상.............................”
샤로프는 약간 실망감이 섞인 표정으로 내게서 수통을 가져갔다. 나도 모르게 남김없이 다 마셔버렸기 때문이었다. 샤로프는 다시 물을 뜨러 가야 하는 귀찮음을 표출하며 하지만 내게
회심의 놀라게 해줄 기사거리가 있다는 듯 미심쩍게 웃어보였다.
“그 여자 엘프가 어떻게 엘븐 포레스트를 뒤집히게 했는지 알면 놀랄걸?......................................”
나는 어쩐지 그의 미심쩍은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다음으로 나온 말에 대한 내 반응은 샤로프를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게 만들었다.
“정사에 미쳐서... 수십 일간 신변을 감추고 다니며 엘븐 포레스트 곳곳의 남자 엘프를 강간했대... 여자가 말야... 그것도 모자라서 뒤끝을 없애기 위해 모조리 살해했다나?... 공식적으로
발표된 문서에도... 아... 요번에 갖고 왔던 문서에도 적혀있었다지?... 진홍색 단검..............................................”
“진홍색 단검?.......................................................”
샤로프는 자못 심각하게 표정이 변한 나를 그저 의외의 소식에 놀란 것으로 치부한 채 자신만의 어떤 상상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워낙... 특이한 사건이라 그녀에게 붙은 별명이 호칭으로 변할 만큼 파급적이었나 봐... 늘 단검을 새빨간 피로 물들이고 다니기 때문에 그랬겠지... 아마 내 생각이건데... 그녀는 단순히
살인을 즐기진 않았을 거야... 왜... 붉은 단검도 아닌 ‘진홍색...’ 이란 수식어가 가미된 호칭이 붙었겠어?... 진홍색이 무슨 색깔이라 생각해?... 검붉지만 예쁜 색을 지칭할 때 쓰잖아...
섬뜩할 정도로 예쁜... 하지만 위험한 단검이란 거지..............................................”
“................................................................”
나는 입을 다문 채 초점이 고정되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샤로프는 내게서 가져간 수통을 쥔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일어서서 수돗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이!... 과업 시작 직전인데... 어딜 가나!..........................................”
“물 좀 뜨러 다녀오겠습니다!... 헤헤..............................................”
“저... 자식이... 쉬는 시간엔 뭐하다가 이제야..................................................”
훈련장으로 들어오던 교관은 한심한 듯 그런 샤로프의 모습을 보면서 호통을 쳤고 녀석은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연신 헤죽거렸다. 나는 그런 샤로프의 뒷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약간 쌀쌀한 바람을 느끼고는 한쪽 팔을 문질렀다. 어쩐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감싸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피... 유피..............................................”
탕... 탕................................
“유피... 유피........................................................”
문을 두드리는 내 손동작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거칠어져가고 있었다. 늘상 마중 나오던 유피가 오늘따라 보이지 않음으로써 훈련장에서 동료의 말을 듣고 느꼈던 불안감을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픈 생각이 힘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유피와 다시 제대로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여자 엘프의 집은 말없이 발길을 끊어버린 상태였다. 행여나 갔다가 또 무슨 유혹에
걸릴지 몰라서 일부러 쳐다도 안 보고 있었으나 그 점은 이제 와서 생각하기 싫은 가설에 근거를 더하고 있었다.
“유피!... 유피!....................................................”
목소리가 거의 외쳐가는 톤으로 올라갈 즈음 문이 딸깍하고 열렸다. 하지만 그 나무 문을 열고 얼굴을 보인 건 유피가 아닌 낯익은 얼굴이었다.
“로키 아니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유피의 어머니를 보고서야 나는 무의식적으로 계속 두들기던 동작을 멈춘 채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침을 꿀꺽 삼키면서 물어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유피... 어디 갔나요?.................................................”
유피 어머니의 시선이 잠깐 골목 끝 쪽으로 옮겨졌다가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유피는 낮에 시내로 나가던 것 같던데.............................................”
“혼자 갔나요?....................................................”
“아니... 웬 친절하게 생긴 엘프가 한 명 와서 데리고 갔단다... 엘븐 포레스트 쪽에서 아가씨들 용으로 새로 제작한 장신구가 들어왔다고 하면서... 한번 구경해보라고... 괜찮니?.......”
무심코 대답하던 유피의 어머니가 나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마도 새하얗게 질려버린 얼굴 때문이겠지만 나는 그런 유피 어머니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고 곧바로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훈련장에서 들었던 얘기가 그 엘프와 관련이 있을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을 휘두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땀방울이 몸 곳곳에서
스며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오래간만에 찾아가보는 길이었다. 며칠이 지났는지는 가늠할 여유도 없었으나 나는 구불구불 갈라진 골목길에서 여자 엘프의 그 허름한 판잣집을 정확히
찾아가고 있었다. 기억 속 풍경이 익숙하게 눈앞에 펼쳐져 갔다.
하지만 부지런히 달리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단 생각은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찾는 게 아주 시급하단 생각에 지금은 왼쪽 허리에 달린 롱 소드
한 자루만에 의지해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여자 엘프의 집이 가까워졌고 나는 한달음에 달려온 숨을 최대한 차분하게 고르면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여자 엘프 정도의 밝은 귀라면
인기척을 들키고도 남을 것이었지만 본능적으로 그렇게 행동하게 되고 있었다.
“.................................................................”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을 하지만 확률 높은 불길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는 당위성을 간직한 채 문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밀어보았다. 삐걱 하고 살며시 열리는 문이다.
언젠가 경험했던 비슷한 느낌이다. 그러나 내가 어두운 안 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몸을 조금 집어넣는 순간 굳어버릴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물론 그렇게 하려는 의도와는 전혀 맞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었다.
“왔어요?................................................”
나는 온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끼면서도 마치 그것을 뿌리치기라고 하듯 문을 힘껏 밀었다. 당황함 때문인지 문은 완전히 반대쪽까지 거칠게 밀려져 들어가 안쪽 벽을 강타했다.
“오래간만이에요... 로키 씨...................................................”
나의 이 무례에는 상관없다는 듯 특유의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는 여자 엘프. 그녀 말마따나 정말로 오래간만이다. 며칠인진 여전히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자태와
용모는 한때나마 정신없이 빠졌고 그 사이의 공백을 길게 느껴지도록 만들 정도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가벼운 연녹색 셔츠에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는 그녀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살짝
교차시킨 채 벽에 등을 기대어 서 있었다. 그러나 내가 더욱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건 그녀 옆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의 실루엣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실루엣이라고 느껴졌던 건
잘 안 보는 구석쪽이기도 했으나 단순한 그림자로 치부하고 싶은 내 심리도 작용했으리라.
“유피...!......................................................”
반사적으로 외치듯 튀어나오는 내 목소리. 그러나 절규하듯 이름을 부르는 내 시도와는 달리 유피는 힘겨운 듯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음성으로 답할 뿐이었다.
“로... 키..................................................”
나는 온 몸을 떨면서 유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천장에서 내려온 밧줄이 그녀의 두 손목을 하나로 묶고 위로 쳐들고 있었다. 그녀가 즐겨 입는 하늘색 원피스는 구석구석이 찢어진 채
맨살을 드러냈으며 아래쪽 치마 부분도 심하게 손상돼 거의 팬티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한쪽 젖가슴은 찢어진 천 사이로 튀어나와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어두운 집안 내부라서 그런지
상처가 있는지까진 살필 수 없었지만 내가 오기 전까지 무슨 짓을 당했는지는 생각지 않기로 했다. 나는 비틀거리듯 힘겹게 서있는 그녀의 모습을 못본 채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
왜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툭 건들면 부서져버릴 것 같은 위험 속의 그녀 때문이었을까? 누가 사랑을 강하다고 했는가. 사랑한 만큼 이성을 찾지 못해 파멸할 것 같은
현실이 여기 있건만. 여자 엘프는 언제나 처럼 아주 여유롭게 차분히 친절하게 내가 단어를 고를 시간을 무제한급으로 허용해주었다. 그러나 사실 내가 그녀에게 말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녀를... 놔줘요.....................................................”
여자 엘프는 미소띤 자세 그대로 팔짱을 살짝 풀더니 허리춤으로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는 약간 뒤쪽에 있는 가죽으로 감싼 그 무엇에서 날카로운 것을 빼어들어 공중으로 조금 던졌다.
빛이라곤 거의 없는 침침함 속에서도 단검날이 반짝이며 몇 바퀴 돌았고 정확히 손잡이 부분으로 그녀는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받아내었다.
“조금 앞서갔어요.... 당신의 의문 먼저 맞춰보기..............................................”
“네가... 진홍색 단검이냐!....................................................”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팔에 핏줄이 돋도록 검을 뽑아 들었고 여자 엘프는 그런 내 동작은 아랑곳없다는 듯 단검을 이리저리 손가락 사이로 돌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검을 그녀에게 겨누며 한마디한마디 또박또박 외쳤다.
“왜... 이런... 구석진 골목 판잣집에서... 숨어 지냈는지 이제 알겠군... 구질구질하게... 인질로 잡지 말고... 엘븐 포레스트를 아주 떠들썩하게 만든... 네 명성에 걸맞는 결투를 하는 쪽이
낫지 않겠나?..........................................................”
이러한 내 도발이 그녀에게 그것도 엘프에게 먹힐 법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런 경우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내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여자 엘프는 여전히 단검을 손가락 사이로 아주
유연하게 놀리면서 벽에 기댄 자세 그대로 살짝 나를 바라보았다.
“샤로프란... 당신의 동료가 시기 적절하게 잘 알려줬나 보네요... 정보를 흘리는 걸 게걸스럽게 받아먹더니.......................................”
“내... 물음에 대답하라!.....................................................”
애초부터 그녀의 의도대로 샤로프가 움직이게 됐었다는 사실 정도는 지금 이 상황에서 내게 아무런 임팩트도 주지 못했다. 내 머릿속은 온통 유피를 구해내야 한다는 사실 자체로 최선의
명령을 짜내 의지로 바꾸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에 여자 엘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벽에서 등을 조금 떼었다. 그리고 내가 긴장해서 자세를 제대로 잡으려는 찰나 휘익하는 바람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
단검이 날아온 게 아니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내 앞까지 뛰어와 목에 단검 날을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에 도약해서 뛰어온 건지 아니면 몇 번 땅에 발을 대었는지는 모른다. 나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 채 내 가슴 부분에서 날 올려다보는 여자 엘프의 시선만 마주칠 뿐이었다.
“미처... 준비를 못했나요?...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게 다시 올까요?.............................................”
그녀는 여전히 친절하게 물건이라도 권하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롱 소드를 쥔 손을 부들거리며 떨다가 차분히 정자세로 섰다. 무언의 패배 선언. 여자 엘프는 착한 아이를 보는 것 마냥
생긋 미소지으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고 나는 이제껏 맛보지 못한 치욕감이 몸 속 깊은 곳에서 밀려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세월을 검 연습으로 보냈건만 그런 내 노력 따윈
하등 부질없는 쓰레기 실력이란 걸 이 순간 너무도 짧고 간결하게 와 닿았다.
절망적일 정도로 쓴맛이 느껴져야 정상이겠지만 나는 일단 그 감정도 보류해야 했다. 지금은 무엇보다 유피가 급선무였다. 하지만 어떻게? 검 실력은 방금의 짧은 대치로 내 쪽이 한참
아래라는 것이 증명됐고 여전히 유피는 천장으로 손이 묶인 채 도망갈 구석이 없다. 여자 엘프의 단검 실력이라면 1초 내외로 그녀의 목숨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유피는 이제 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힘 없이 약간 구부린 상태였다. 천장으로 묶여서 치켜올려진 밧줄이 그녀를 억지로 서있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날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나는 그녀에게 뭘 해줄 수 있나? 한 사람의 목숨도 제대로 지켜줄 수 없는 이 상황을 만든 건 나 아닌가.
“원하는 게 뭐지?..................................................”
나는 머리카락 사이로 그런 유피의 모습을 가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조금 떨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자 엘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단검을 휘릭 돌렸다.
“말투부터... 예전의 당신처럼..............................................”
“원하는 게 뭔가요...................................................”
나는 그녀가 발이라도 핥으라면 핥겠다는 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 엘프는 아까 그 자리에서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한가롭게 말했다.
“당신을 다시 보고 싶었어요... 그저 순수하게... 제 맘... 당신도 잘 알잖아요... 나는 당신과 정사를 나누고 끌어안던 시간이 너무도 좋아서 언제나처럼 이 자리에 기다렸죠... 그러나
오지 않았어요... 뭐 그것까진 좋아요... 그러나 앞으로도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면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계속 오지 않았죠......................”
“그래서... 유피를 끌어들였습니까?............................”
나는 유피가 이 여자 엘프와 내가 정사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말이 끝났다고 여져지는 순간 곧바로 반문했다. 여자 엘프는
이 상황을 마치 ‘만나고 싶어서 집 앞까지 찾아왔다’ 는 정도의 행동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다른 상황 다른 때 같으면 누구나 빠져들법한 매력적인 미소를 생긋 지으며 그녀는
나를 달래듯 말했다.
“저... 아이가 정말 당신과 어떤 관계인지는 별로 신경쓰고 싶지도 않아요... 또 당신이 나와 결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질투요?... 후후... 그건 인간들 사이에서나 나도는 감정이죠...
우리 엘프들은 정해진 순리를 억지로 바꾸려고 하지 않아요... 언제나 상대를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죠.................................”
나는 그녀가 엘븐 포레스트에서 수십 명을 강간하고 살해하고 신분을 숨긴 채 이곳으로 도피했다는 사실과 지금 내 눈 앞에서 아주 평온하게 옛날 이야기나 하는 듯한 모습 중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때문에 그녀가 날 이곳까지 이끌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자극적인 문서 위조까지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까지 미쳤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능숙하게 휘돌고 있는 단검을 보면 위험한 여자임은 분명했다. 적어도 진홍색 단검이란 호칭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유피라는... 저... 아이는 당신과 나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잠시 빌렸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러한 의식이 끝나면... 아무 일 없이... 당신과 그녀는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의식?..................................................”
나는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 이 순간에도 흘끗 유피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두 손을 천장에 묶인 채로 힘겹게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러나 나는 그녀를
이해했다. 지금 이 순간은 나에게 모든 게 달려 있었다.
“거창한 건 아니에요... 당신과 다시 한번 정사를 하는 것이죠... 그때의 감정으로... 그때의 느낌으로.........................................”
“...!.................................................................”
유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나는 여자 엘프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녀는 또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조금 번복해줄
것을 요청하듯 그녀에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 내가 여기 왔으니까... 그녀는 돌려보내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요................................................”
여자 엘프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거절했다.
“그녀가 가면... 당신은 한시름 놓고 나와 정사를 벌일 거잖아요?... 그러면... 그건 최선을 다하는 정사가 아니죠... 나는... 마지막인 만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길 원해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혼신의 노력... 그러면 나도 만족할 테고... 그러기 위해서는 저 아이가 필요해요..........................................”
나는 착잡한 심경으로 다시 한번 유피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여자 엘프에게는 한 번 마음먹은 건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는 무언의 강박관념 같은 게 느껴졌다. 유피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