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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도 눈물을 흘린다 -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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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이라는 시간.
누구에게는 찰나의 순간처럼 짧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는 억만 겁의 시간처럼 길 수 도 있는 시간이었다. 과거 스캘핑으로 주식을 하던 기철에게 있어서 10분의 시간이란 평균 5번의 매매를 하고 수익을 정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는 것, 이것만큼은 기철을 능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실제로 주식으로도 성공한 그가 아니던가. 남들보다 정확한 판단을 1초라 빨리 해야 승리를 했던 주식 시장의 생리를 생각하면, 기철의 시간 활용이 매우 뛰어남을 간접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 활용이 아니었다. 기철의 시간 활용법은 그에게 시간에 대한 결정권이 있을 때나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상황은 가면 쓴 사내가 기철에게 단 10분이라는 시간을 정해줬고, 기철은 타협도 없이 이 시간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 에 없었다. 더구나 그 10분 안에 퀴즈의 정답을 맞혀야 했다. 이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크크.]
문제를 낸 가면 쓴 사내가 비릿한 웃음소리를 낸 후 허리를 숙여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의자에 묶여 있는 기철의 아내의 발목 쪽에 묶여 있는 밧줄을 풀기 시작한다. 기철은 그때까지도 멍하니 그 모습만을 바라보다가 가면 쓴 사내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여유롭군?. 역시 천하의 최기철이야. 이제 9분 남았다네.]
정신이 번쩍 든 기철은 방금 전 가면 쓴 사내가 낸 퀴즈를 기억해 냈다.
‘원의 절반?. 삼각형의 다리?. 얼굴 없는 십자가?.’
기철은 가면 쓴 사내가 낸 문제가 무엇을 뜻하는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감도 오지 않는 상황에서 이제 채 9분도 남지 않는 시간이 남아 있었고, 기철은 마음이 급해져 갔다.
‘... 넌센스 문제인가?.’
알쏭달쏭한 문제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어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기철은 또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이 문제의 정답이 내 인생 잘못에 대한 어떤 힌트를 준다는 것이지?.’
그러나 더 이상 깊게 생각 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 자신의 인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다는, 단순한 정답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정답을 찾지 못하면, 자신의 그런 의문조차 애초에 풀 수 없기 때문이었다.
[6분 남았다네. 벌써 정답을 알아 낸 건가?. 후후.]
어느새 기철의 아내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을 모두 풀어버린 가면 쓴 사내가 그녀 옆에 서서 기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이 시간이 촉박할수록 실수 할 수 밖 에 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5분.]
이제 절반의 시간 밖에 남지 않았지만, 기철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실마리라는 것 자체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시간에 쫓기기 시작하자 머릿속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침착해야 한다, 급할수록 돌아가자,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등의 온갖 격언들이 순간적으로 떠올랐지만, 그 뿐이었다. 오히려 머리만 더 아파왔다.
[4분.]
욕 짓거리를 날리고 싶었다. 가면 쓴 사내가 남은 시간을 말할 때마다, 기철은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이제 채 4분도 남지 않았다. 기철은 다시 한 번 문제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시 다시... 원의 절반... 원의 반이라... 달인가?.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고... 삼각형의 다리... 삼격형에 다리가 있으면 오징어?. 이것도 아니야... 얼굴 없는 십자가... 십자가에 얼굴이 있었나?.... 아... 도대체 뭐지...’
[3분.]
‘넌센스 퀴즈라면... 단순하게 생각하자. 깊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럴 시간도 없고... 단순하게... 단순하게... 문제를 바라보자. 원의 절반... 일단 원이야... 그리고 삼각형의 다리... 두 번째는 삼각형이고... 마지막으로는 얼굴 없는 십자가... 세 번째는 십자가... 수식어를 다 빼면... 일단 공통점은... 모양이라는 것인데... 아?.’
[2분.]
가면 쓴 사내가 2분이 남았음을 알릴 때, 기철의 머리에는 무언가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공통점은 모양...”
홀로 중얼거린 기철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종이 한 장과 볼펜을 가지고 와서 거실 TV 앞에 앉았다.
“수식어는 빼고... 일단... 모양부터... 문제에서 말하는 모양부터 그린다...”
[크크.]
기철은 가면 쓴 사내가 비웃든지 말든지, 종이에 볼펜으로 원, 삼각형, 십자가를 차례대로 그렸다. 그리고 잠시 세 모양을 쳐다보았다.
[1분.]
이제 채 1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기철은 당황하지 않았다. 여기서 허둥대다가는 지금 잡고 있는 실마리조차 머릿속에서 흩어질 우려가 있었다. 그러면 이 내기에서 가면 쓴 사내에게 패배하게 되고, 자신의 아내의 원피스가 벗겨질 수가 있었다.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그래... 이 모양에... 수식어를 하나씩 대입해 보면... 먼저, 원의 절반...”
기철은 먼저 종이에 그려진 원을 절반으로 나누었다. 역시나 반달 모양이 되었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삼각형에 다리를 그려 보았다.
“어... 삼각형의 다리.... 이거 알파벳 A자와 비슷한데... 그렇다면... 얼굴 없는 십자가는...”
[30초.]
기철은 더 이상 가면 쓴 사내의 말이 들리지 않을 만큼 집중해 있었다. 그리고 이어 십자가의 윗부분을 지워보았다.
“얼굴 없는 십자가... 이건 알파벳 T잖아...”
[20초.]
“그러면.... 원의 절반은... 이 반달은... 뭐지?. 아... 이건 설마?.”
[10초.]
삼각형의 다리와 얼굴 없는 십자가가 뜻하는 것은 알파벳 A와 T였다. 그렇다면 원의 절반도 알파벳을 뜻하는 것이리라. 기철은 원의 절반을 다시 보았고, 그때서야 자신의 눈동자에 C가 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원의 절반은 C, 삼각형의 다리는 A, 얼굴 없는 십자가는 T, 정답은 CAT, 바로 고양이야!!.”
기철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을 한 나머지, 정답을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던 가면 쓴 사내를 TV 화면으로 쳐다봤다.
[오호. 역시 최기철이야. 그렇게 어려운 문제도, 또 쉬운 문제도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10분 이내에 풀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봤는데... 정신적 압박을 이겨내면서까지 정답을 알아내는군.]
“약속은 지키겠지?.”
[그거야 당연하지. 뭐, 나로서는 여자의 매끈한 몸을 못 보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 시기가 미뤄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크크. 어찌 됐든, 이번 게임은 친구의 승리일세. 허나,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가면 쓴 사내가 낸 문제를 어렵사리 풀어내긴 했지만, 기철은 다시 한 번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자신의 아내를 지키려면, 가면 쓴 사내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 살아오면서 잘못을 했던 일들... 그 중에 하나를 정확하게 고백을 해야 했다. 기철에게 있어서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본 게임을 시작하지. 이번에도 여자의 원피스를 걸겠네. 너는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해야 승리할 수 있어. 다시 말하지만 그러면 아내를 돈만 받고 무사히 돌려주겠네.]
“휴우...”
[이봐, 친구. 너무 긴장할 거 없어.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네가 승리할 수 있어. 더구나 난 힌트까지 줬다네.]
“... 고양이...”
[크크. 힌트는 비단 고양이 뿐 만 아니라네. 이봐, 친구. 우리는 대화를 꽤 많이 했지. 그리고 난 그 속에서 여러 가지 힌트를 주었다네. 이제 고백을 하고 잘못을 빌어 봐. 그러면 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다네.]
기철은 가면 쓴 사내의 말이 하나도 와 닿지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면 쓴 사내에게 잘못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주었다는 힌트도 도대체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휴우....”
[이제 본격적으로 첫 번째 게임을 할 시간이 되었다네. 어떤가?. 마음의 준비가 되었나?.]
“음...”
[크크. 고민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친구의 인생에 잘못이 많다는 것이겠지?. 난 더 이상 기다려 줄 수 없다네. 이제 시작하게.]
“그... 그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물론, 나에게 시간은 많지만... 여기서 시간을 더 주게 되면, 게임이 재미가 없어지지 않겠나?. 방금 전에도 내가 1시간의 여유를 줬다면 아주 싱겁게 친구가 이겼을 테지. 게임은 스릴감이 있어야 한다네. 어서 시작하게. 1분 안에 시작하지 않으면, 첫 번째 게임은 나의 승리가 될 걸세.]
말을 마친 가면 쓴 사내는 지긋이 기철을 바라볼 뿐이었다. 기철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어서 가면 쓴 사내가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유추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을 보낸다면,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가 가면 쓴 사내에게 원피스를 벗겨질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를 할 수가 없었다.
“휴우...”
더 이상 선택권이 없는 기철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첫 번째 고백)
17년 전.
S대학 경제학과에 수석으로 입학 한 기철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몫에 받았다. 원래 성격상으론 사람의 관심을 받는 것을 불편해 하는 기철이었으나, 의외로 대학생활이라는 게 사람들의 관심이 많을수록 편한 부분이 많아서 대학에 진학하면서 그것을 즐길 수 있게 된 기철이었다.
그래서인지 기철의 성격도 대학에 오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사교성이 높아졌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셔서 고아원에서 자라나서 그런지, 주위 친구들의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대학에 와서는 동기와 선배들과도 상당히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기철은 동기나 선배들과 술자리도 자주 어울렸지만, 그래도 꾸준히 공부를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질시를 받아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공부 밖 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오기 전까지 공부는 기철에게 있어 자존심과 같았다. 그래서 공강 시간에는 항상 과 도서관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는 기철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기철의 눈에 띠는 여자가 있었다.
긴 생머리에 160 중반은 될 것 같은 키, 그리고 무엇보다 크게 꾸미지 않아도 육감적인 몸매가 인상적인 여자였는데, 얼굴이 그렇게 예쁘지 않았지만, 기철에게 있어서는 음심이 동할 정도로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후에 기철이 알게 되었지만, 그녀의 이름은 박지연, 나이는 기철보다 3살 많았지만, 학번은 1년 선배 - 삼수를 한 듯 했다 - 였다.
기철은 선배인 지연을 볼 때마다 야릇한 마음 때문에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사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무엇보다 지연의 풍만한 하체에 눈길이 갔다. 거의 청바지만 입고 오는 지연 - 스스로는 하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 이었지만, 기철이 보기에는 그녀의 허벅지와 엉덩이의 풍만함과 탄력 때문에 청바지가 터질 듯이 느껴졌다.
“저 년이 내 위에 올라타서 찍어주면 미쳐버릴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지연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기철이었다. 그리고 공부를 하면서도 틈틈이 어떻게 하면 지연과 잘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사실 20살을 먹을 때까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기철이었지만, 여자와의 경험은 많았다. 그가 찍은 여자는 어떻게 하든지, 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기철이었다.
그렇게 지연을 먹고 싶어 하는 생각으로 기회를 엿보던 기철에게 뜻 밖에도 큰 기회가 왔다. 기철의 선배 하나가 학교 앞에 큰 원룸으로 이사를 와서 몇몇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그 중 기철과 지연이 끼었던 것이다. 그날 기철과 지연은 서로 제대로 된 첫 인사를 나누고 같이 술을 마시며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그치?.”
“누나.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1학년인데, 참 열심히 공부하더라... 난 삼수하고 들어와서 남들보다 늦으니... 기철이 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데...”
“앞으로 같이 공부해요.”
“그럴까?.”
술자리의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화기애애했다. 기철은 간간히 선배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면서 지연을 훔쳐보았다. 역시나 풍만한 하체가 기철의 음심을 돋우게 만들었다. 술도 마신 기철은 당장이라도 지연을 눕혀서 맛을 보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아참... 누난 남자친구 있어요?.”
“왜?. 한 명 소개 시켜 주려고?.”
“하하하. 네.”
“호호. 아쉽다... 조금만 빨리 만났으면 한 명 소개 받는 건데... 사실 남자친구 있어. 지금은 군대에 가 있지만...”
“그래요?. 외롭겠다.”
“뭐... 그렇지 뭐.”
지연의 남자친구가 군대 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철은 더욱 더 지연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역시도 군대 가 있는 남친 때문에 외롭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이 충분히 몸으로서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철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철의 생각은 술자리 내내 음흉한 눈빛으로 지연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형. 고마웠어요.”
“선배. 즐거웠어요.”
어느새 시간이 자정을 훌쩍 넘었고, 기철의 선배 몇몇이 원룸에서 정신을 놓으면서 술자리는 끝이 나게 되었다. 기철은 지연을 포함한 몇몇 선배들과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기철이는 어디로 가냐?.”
“저... 학교 후문에서 자취해요.”
“그래?. 그러면... 지연이랑 가면 되겠네. 선배 잘 모셔라.”
“네.”
기철은 지연과 단 둘이 늦은 시간에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어떻게 지연과 함께 집에 갈 수 있을까 고민을 했었는데, 너무나 쉽게 해결 되어서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누나 갈까요?.”
“그래.”
기철은 지연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갑자기 늦은 시간에 둘 만 걸어가게 되어서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지만, 이내 곧 기철이 입을 열었다.
“누나는 어디 사세요?.”
“아... 나도 학교 후문에서 자취해.”
“그렇구나.”
학교 후문에서 자취를 한다는 지연의 말에 기철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둘이서 학교 후문까지는 같이 걸어갈 수 밖 에 없는데, 그렇다면 학교 정문을 반드시 통과해서 학교 내부를 걸어 후문으로 가야했다. 대충 20분 정도의 거리였다.
“그래서 누나도 도서관에서 자주 볼 수 있군요. 우리 과 건물이 후문 쪽에 있으니...”
“도서관이 가까워도 공부하기 싫은 애들은 안 오는데... 기철이는 왜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해?. 취직 때문에?. 고시?. CPA?.”
“하하. 아직 뭘 할지는 모르겠고요. 그냥 어릴 때부터 공부가 제 자존심이었어요. 일단 무엇을 할지 모르겠지만... 공부를 해놓으면 편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대단하네.”
지연은 진심으로 기철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20살과는 다르게 생각도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같은 대화를 하더라도 기철은 지연과의 대화 내용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로지 주변 상황만 살펴보았다. 지연과 걸어가는 이 길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또는 적당히 몸을 숨기는 장소가 있는지.
“누나는 남자친구랑 오래 사귀었나요?.”
“음... 그걸 왜 물어?.”
“궁금해서요. 저도 연애도 해보고 싶은데... 하하.”
“그래?. 기철이는 여자 친구 없어?. 누나가 하나 소개 시켜줄까?.”
“그러면 저야 좋고요. 나중에 꼭 소개 시켜주세요.”
“그럴게.”
“그건 그렇고 연애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제 질문에도 대답 좀 해주시고요.”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군대에 간 남자 친구 생각일까. 지연은 기철의 질문을 받고 조금은 감성적으로 변해 있었다.
“남자친구와 사귄지는 벌써 6년 정도 됐어.”
“우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사귄 거네요?.”
“응.”
“동갑?.”
“아니, 학교 1년 선배였어. 나보다 1살 많아. 비록 나와는 달리 대학을 가지는 않았는데... 내가 삼수를 할 때... 내 옆에서 항상 힘이 되 주고... 그랬지.”
“그렇구나.”
“가만 보니까... 기철이랑 키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 이름은 민우야... 김민우...”
기철은 지연과 대화를 나누면서 여전히 주위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새 기철과 지연은 대학 정문을 통과하면서 학교 내부로 들어온 상태였다. 자정이 넘은 대학교는 대체적으로 어두웠고,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가 않았다. 이제 후문까지는 대충 10분 거리, 기철은 후문까지 걸어가는 길을 생각하며 마땅한 장소를 머릿속으로 찾기 시작했다.
“이름도 멋있네요.”
“응. 멋지지...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야.”
“아이고... 닭살 돋네요. 누나 얼굴 빨개졌는데... 생각만 해도 그렇게 좋아요?.”
“어머... 정말 얼굴 빨개?.”
“네.”
“술을 마셔서 그런가... 남자 친구를 떠올리니까... 기분은 좋아. 그런데 슬프기도 하고...”
“군대에 간지는 얼만 됐어요?.”
“이제 1년 됐어.”
“누나 대단하네요. 보통은 그 전에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는데...”
“............”
지연은 남자친구가 그리웠는지, 한동안 말없이 밤하늘을 보고 걷고 있었고, 기철은 드디어 자신이 생각한 장소가 다가오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기다려야지. 정말 많이 좋아하니까....”
“그냥 속 시원하게 사랑한다고 말하시지... 후배 앞이라 부끄러우시나 봐요?.”
“호호. 그래 많이 사랑해... 군대에 가기 전에는 서로 결혼도 하자고 약속을 했는데....”
이제 10m가 남을 뿐이었다. 기철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이제 10m만 더 가면 인문대학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건물을 돌아서면 바로 주차장이었다. 낮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다.
“와 결혼까지요?.”
“응. 물론,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대로라면 몇 년 뒤에 결혼하지 않을까?.”
“그렇겠네요.”
5m. 마음속으로 기철이 거리를 잰다.
“그러면 엄청 서로 가깝겠네요?.”
“당연하지.”
“연인끼리 가까우면....”
기철이 말을 함과 동시에 그와 지연은 인문대학 건물 뒤편으로 돌아섰고, 이제는 더욱 더 어두운 주차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지연은 주차장을 가로 질러 대학교 후문으로 갈 생각이지만, 기철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 가까우면 섹스도 많이 했겠네요?.”
“... 뭐... 뭐라고?.”
지연은 갑작스런 기철의 말에 당황을 했고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지연을 보고 기철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왜 놀라요?. 남자친구 자지가 누나 보지를 많이 박아봤냐고 물어 본 것 뿐 인데?. 남자친구 생각하면 보지가 벌렁벌렁 하지 않아요?.”
“너... 너...”
지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기철을 외면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뒤를 돌아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기철은 바로 지연을 뒤에서 안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보지가 벌렁 벌렁하지?. 내 자지 맛 좀 보지 그래?. 이 갈보 년아.”
... 4부에서 계속 됩니다.
누구에게는 찰나의 순간처럼 짧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는 억만 겁의 시간처럼 길 수 도 있는 시간이었다. 과거 스캘핑으로 주식을 하던 기철에게 있어서 10분의 시간이란 평균 5번의 매매를 하고 수익을 정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는 것, 이것만큼은 기철을 능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실제로 주식으로도 성공한 그가 아니던가. 남들보다 정확한 판단을 1초라 빨리 해야 승리를 했던 주식 시장의 생리를 생각하면, 기철의 시간 활용이 매우 뛰어남을 간접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 활용이 아니었다. 기철의 시간 활용법은 그에게 시간에 대한 결정권이 있을 때나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상황은 가면 쓴 사내가 기철에게 단 10분이라는 시간을 정해줬고, 기철은 타협도 없이 이 시간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 에 없었다. 더구나 그 10분 안에 퀴즈의 정답을 맞혀야 했다. 이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크크.]
문제를 낸 가면 쓴 사내가 비릿한 웃음소리를 낸 후 허리를 숙여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의자에 묶여 있는 기철의 아내의 발목 쪽에 묶여 있는 밧줄을 풀기 시작한다. 기철은 그때까지도 멍하니 그 모습만을 바라보다가 가면 쓴 사내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여유롭군?. 역시 천하의 최기철이야. 이제 9분 남았다네.]
정신이 번쩍 든 기철은 방금 전 가면 쓴 사내가 낸 퀴즈를 기억해 냈다.
‘원의 절반?. 삼각형의 다리?. 얼굴 없는 십자가?.’
기철은 가면 쓴 사내가 낸 문제가 무엇을 뜻하는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감도 오지 않는 상황에서 이제 채 9분도 남지 않는 시간이 남아 있었고, 기철은 마음이 급해져 갔다.
‘... 넌센스 문제인가?.’
알쏭달쏭한 문제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어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기철은 또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이 문제의 정답이 내 인생 잘못에 대한 어떤 힌트를 준다는 것이지?.’
그러나 더 이상 깊게 생각 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 자신의 인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다는, 단순한 정답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정답을 찾지 못하면, 자신의 그런 의문조차 애초에 풀 수 없기 때문이었다.
[6분 남았다네. 벌써 정답을 알아 낸 건가?. 후후.]
어느새 기철의 아내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을 모두 풀어버린 가면 쓴 사내가 그녀 옆에 서서 기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이 시간이 촉박할수록 실수 할 수 밖 에 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5분.]
이제 절반의 시간 밖에 남지 않았지만, 기철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실마리라는 것 자체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시간에 쫓기기 시작하자 머릿속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침착해야 한다, 급할수록 돌아가자,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등의 온갖 격언들이 순간적으로 떠올랐지만, 그 뿐이었다. 오히려 머리만 더 아파왔다.
[4분.]
욕 짓거리를 날리고 싶었다. 가면 쓴 사내가 남은 시간을 말할 때마다, 기철은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이제 채 4분도 남지 않았다. 기철은 다시 한 번 문제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시 다시... 원의 절반... 원의 반이라... 달인가?.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고... 삼각형의 다리... 삼격형에 다리가 있으면 오징어?. 이것도 아니야... 얼굴 없는 십자가... 십자가에 얼굴이 있었나?.... 아... 도대체 뭐지...’
[3분.]
‘넌센스 퀴즈라면... 단순하게 생각하자. 깊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럴 시간도 없고... 단순하게... 단순하게... 문제를 바라보자. 원의 절반... 일단 원이야... 그리고 삼각형의 다리... 두 번째는 삼각형이고... 마지막으로는 얼굴 없는 십자가... 세 번째는 십자가... 수식어를 다 빼면... 일단 공통점은... 모양이라는 것인데... 아?.’
[2분.]
가면 쓴 사내가 2분이 남았음을 알릴 때, 기철의 머리에는 무언가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공통점은 모양...”
홀로 중얼거린 기철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종이 한 장과 볼펜을 가지고 와서 거실 TV 앞에 앉았다.
“수식어는 빼고... 일단... 모양부터... 문제에서 말하는 모양부터 그린다...”
[크크.]
기철은 가면 쓴 사내가 비웃든지 말든지, 종이에 볼펜으로 원, 삼각형, 십자가를 차례대로 그렸다. 그리고 잠시 세 모양을 쳐다보았다.
[1분.]
이제 채 1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기철은 당황하지 않았다. 여기서 허둥대다가는 지금 잡고 있는 실마리조차 머릿속에서 흩어질 우려가 있었다. 그러면 이 내기에서 가면 쓴 사내에게 패배하게 되고, 자신의 아내의 원피스가 벗겨질 수가 있었다.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그래... 이 모양에... 수식어를 하나씩 대입해 보면... 먼저, 원의 절반...”
기철은 먼저 종이에 그려진 원을 절반으로 나누었다. 역시나 반달 모양이 되었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삼각형에 다리를 그려 보았다.
“어... 삼각형의 다리.... 이거 알파벳 A자와 비슷한데... 그렇다면... 얼굴 없는 십자가는...”
[30초.]
기철은 더 이상 가면 쓴 사내의 말이 들리지 않을 만큼 집중해 있었다. 그리고 이어 십자가의 윗부분을 지워보았다.
“얼굴 없는 십자가... 이건 알파벳 T잖아...”
[20초.]
“그러면.... 원의 절반은... 이 반달은... 뭐지?. 아... 이건 설마?.”
[10초.]
삼각형의 다리와 얼굴 없는 십자가가 뜻하는 것은 알파벳 A와 T였다. 그렇다면 원의 절반도 알파벳을 뜻하는 것이리라. 기철은 원의 절반을 다시 보았고, 그때서야 자신의 눈동자에 C가 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원의 절반은 C, 삼각형의 다리는 A, 얼굴 없는 십자가는 T, 정답은 CAT, 바로 고양이야!!.”
기철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을 한 나머지, 정답을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던 가면 쓴 사내를 TV 화면으로 쳐다봤다.
[오호. 역시 최기철이야. 그렇게 어려운 문제도, 또 쉬운 문제도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10분 이내에 풀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봤는데... 정신적 압박을 이겨내면서까지 정답을 알아내는군.]
“약속은 지키겠지?.”
[그거야 당연하지. 뭐, 나로서는 여자의 매끈한 몸을 못 보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 시기가 미뤄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크크. 어찌 됐든, 이번 게임은 친구의 승리일세. 허나,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가면 쓴 사내가 낸 문제를 어렵사리 풀어내긴 했지만, 기철은 다시 한 번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자신의 아내를 지키려면, 가면 쓴 사내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 살아오면서 잘못을 했던 일들... 그 중에 하나를 정확하게 고백을 해야 했다. 기철에게 있어서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본 게임을 시작하지. 이번에도 여자의 원피스를 걸겠네. 너는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해야 승리할 수 있어. 다시 말하지만 그러면 아내를 돈만 받고 무사히 돌려주겠네.]
“휴우...”
[이봐, 친구. 너무 긴장할 거 없어.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네가 승리할 수 있어. 더구나 난 힌트까지 줬다네.]
“... 고양이...”
[크크. 힌트는 비단 고양이 뿐 만 아니라네. 이봐, 친구. 우리는 대화를 꽤 많이 했지. 그리고 난 그 속에서 여러 가지 힌트를 주었다네. 이제 고백을 하고 잘못을 빌어 봐. 그러면 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다네.]
기철은 가면 쓴 사내의 말이 하나도 와 닿지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면 쓴 사내에게 잘못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주었다는 힌트도 도대체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휴우....”
[이제 본격적으로 첫 번째 게임을 할 시간이 되었다네. 어떤가?. 마음의 준비가 되었나?.]
“음...”
[크크. 고민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친구의 인생에 잘못이 많다는 것이겠지?. 난 더 이상 기다려 줄 수 없다네. 이제 시작하게.]
“그... 그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물론, 나에게 시간은 많지만... 여기서 시간을 더 주게 되면, 게임이 재미가 없어지지 않겠나?. 방금 전에도 내가 1시간의 여유를 줬다면 아주 싱겁게 친구가 이겼을 테지. 게임은 스릴감이 있어야 한다네. 어서 시작하게. 1분 안에 시작하지 않으면, 첫 번째 게임은 나의 승리가 될 걸세.]
말을 마친 가면 쓴 사내는 지긋이 기철을 바라볼 뿐이었다. 기철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어서 가면 쓴 사내가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유추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을 보낸다면,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가 가면 쓴 사내에게 원피스를 벗겨질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를 할 수가 없었다.
“휴우...”
더 이상 선택권이 없는 기철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첫 번째 고백)
17년 전.
S대학 경제학과에 수석으로 입학 한 기철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몫에 받았다. 원래 성격상으론 사람의 관심을 받는 것을 불편해 하는 기철이었으나, 의외로 대학생활이라는 게 사람들의 관심이 많을수록 편한 부분이 많아서 대학에 진학하면서 그것을 즐길 수 있게 된 기철이었다.
그래서인지 기철의 성격도 대학에 오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사교성이 높아졌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셔서 고아원에서 자라나서 그런지, 주위 친구들의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대학에 와서는 동기와 선배들과도 상당히 친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기철은 동기나 선배들과 술자리도 자주 어울렸지만, 그래도 꾸준히 공부를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질시를 받아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공부 밖 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오기 전까지 공부는 기철에게 있어 자존심과 같았다. 그래서 공강 시간에는 항상 과 도서관에서 자리를 잡고 공부하는 기철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기철의 눈에 띠는 여자가 있었다.
긴 생머리에 160 중반은 될 것 같은 키, 그리고 무엇보다 크게 꾸미지 않아도 육감적인 몸매가 인상적인 여자였는데, 얼굴이 그렇게 예쁘지 않았지만, 기철에게 있어서는 음심이 동할 정도로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후에 기철이 알게 되었지만, 그녀의 이름은 박지연, 나이는 기철보다 3살 많았지만, 학번은 1년 선배 - 삼수를 한 듯 했다 - 였다.
기철은 선배인 지연을 볼 때마다 야릇한 마음 때문에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사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무엇보다 지연의 풍만한 하체에 눈길이 갔다. 거의 청바지만 입고 오는 지연 - 스스로는 하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 이었지만, 기철이 보기에는 그녀의 허벅지와 엉덩이의 풍만함과 탄력 때문에 청바지가 터질 듯이 느껴졌다.
“저 년이 내 위에 올라타서 찍어주면 미쳐버릴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지연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기철이었다. 그리고 공부를 하면서도 틈틈이 어떻게 하면 지연과 잘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사실 20살을 먹을 때까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기철이었지만, 여자와의 경험은 많았다. 그가 찍은 여자는 어떻게 하든지, 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기철이었다.
그렇게 지연을 먹고 싶어 하는 생각으로 기회를 엿보던 기철에게 뜻 밖에도 큰 기회가 왔다. 기철의 선배 하나가 학교 앞에 큰 원룸으로 이사를 와서 몇몇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그 중 기철과 지연이 끼었던 것이다. 그날 기철과 지연은 서로 제대로 된 첫 인사를 나누고 같이 술을 마시며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그치?.”
“누나.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1학년인데, 참 열심히 공부하더라... 난 삼수하고 들어와서 남들보다 늦으니... 기철이 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데...”
“앞으로 같이 공부해요.”
“그럴까?.”
술자리의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화기애애했다. 기철은 간간히 선배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면서 지연을 훔쳐보았다. 역시나 풍만한 하체가 기철의 음심을 돋우게 만들었다. 술도 마신 기철은 당장이라도 지연을 눕혀서 맛을 보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아참... 누난 남자친구 있어요?.”
“왜?. 한 명 소개 시켜 주려고?.”
“하하하. 네.”
“호호. 아쉽다... 조금만 빨리 만났으면 한 명 소개 받는 건데... 사실 남자친구 있어. 지금은 군대에 가 있지만...”
“그래요?. 외롭겠다.”
“뭐... 그렇지 뭐.”
지연의 남자친구가 군대 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철은 더욱 더 지연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역시도 군대 가 있는 남친 때문에 외롭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이 충분히 몸으로서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철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철의 생각은 술자리 내내 음흉한 눈빛으로 지연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형. 고마웠어요.”
“선배. 즐거웠어요.”
어느새 시간이 자정을 훌쩍 넘었고, 기철의 선배 몇몇이 원룸에서 정신을 놓으면서 술자리는 끝이 나게 되었다. 기철은 지연을 포함한 몇몇 선배들과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기철이는 어디로 가냐?.”
“저... 학교 후문에서 자취해요.”
“그래?. 그러면... 지연이랑 가면 되겠네. 선배 잘 모셔라.”
“네.”
기철은 지연과 단 둘이 늦은 시간에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어떻게 지연과 함께 집에 갈 수 있을까 고민을 했었는데, 너무나 쉽게 해결 되어서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누나 갈까요?.”
“그래.”
기철은 지연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갑자기 늦은 시간에 둘 만 걸어가게 되어서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지만, 이내 곧 기철이 입을 열었다.
“누나는 어디 사세요?.”
“아... 나도 학교 후문에서 자취해.”
“그렇구나.”
학교 후문에서 자취를 한다는 지연의 말에 기철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둘이서 학교 후문까지는 같이 걸어갈 수 밖 에 없는데, 그렇다면 학교 정문을 반드시 통과해서 학교 내부를 걸어 후문으로 가야했다. 대충 20분 정도의 거리였다.
“그래서 누나도 도서관에서 자주 볼 수 있군요. 우리 과 건물이 후문 쪽에 있으니...”
“도서관이 가까워도 공부하기 싫은 애들은 안 오는데... 기철이는 왜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해?. 취직 때문에?. 고시?. CPA?.”
“하하. 아직 뭘 할지는 모르겠고요. 그냥 어릴 때부터 공부가 제 자존심이었어요. 일단 무엇을 할지 모르겠지만... 공부를 해놓으면 편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대단하네.”
지연은 진심으로 기철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20살과는 다르게 생각도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같은 대화를 하더라도 기철은 지연과의 대화 내용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로지 주변 상황만 살펴보았다. 지연과 걸어가는 이 길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또는 적당히 몸을 숨기는 장소가 있는지.
“누나는 남자친구랑 오래 사귀었나요?.”
“음... 그걸 왜 물어?.”
“궁금해서요. 저도 연애도 해보고 싶은데... 하하.”
“그래?. 기철이는 여자 친구 없어?. 누나가 하나 소개 시켜줄까?.”
“그러면 저야 좋고요. 나중에 꼭 소개 시켜주세요.”
“그럴게.”
“그건 그렇고 연애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제 질문에도 대답 좀 해주시고요.”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군대에 간 남자 친구 생각일까. 지연은 기철의 질문을 받고 조금은 감성적으로 변해 있었다.
“남자친구와 사귄지는 벌써 6년 정도 됐어.”
“우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사귄 거네요?.”
“응.”
“동갑?.”
“아니, 학교 1년 선배였어. 나보다 1살 많아. 비록 나와는 달리 대학을 가지는 않았는데... 내가 삼수를 할 때... 내 옆에서 항상 힘이 되 주고... 그랬지.”
“그렇구나.”
“가만 보니까... 기철이랑 키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 이름은 민우야... 김민우...”
기철은 지연과 대화를 나누면서 여전히 주위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새 기철과 지연은 대학 정문을 통과하면서 학교 내부로 들어온 상태였다. 자정이 넘은 대학교는 대체적으로 어두웠고,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가 않았다. 이제 후문까지는 대충 10분 거리, 기철은 후문까지 걸어가는 길을 생각하며 마땅한 장소를 머릿속으로 찾기 시작했다.
“이름도 멋있네요.”
“응. 멋지지...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야.”
“아이고... 닭살 돋네요. 누나 얼굴 빨개졌는데... 생각만 해도 그렇게 좋아요?.”
“어머... 정말 얼굴 빨개?.”
“네.”
“술을 마셔서 그런가... 남자 친구를 떠올리니까... 기분은 좋아. 그런데 슬프기도 하고...”
“군대에 간지는 얼만 됐어요?.”
“이제 1년 됐어.”
“누나 대단하네요. 보통은 그 전에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는데...”
“............”
지연은 남자친구가 그리웠는지, 한동안 말없이 밤하늘을 보고 걷고 있었고, 기철은 드디어 자신이 생각한 장소가 다가오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기다려야지. 정말 많이 좋아하니까....”
“그냥 속 시원하게 사랑한다고 말하시지... 후배 앞이라 부끄러우시나 봐요?.”
“호호. 그래 많이 사랑해... 군대에 가기 전에는 서로 결혼도 하자고 약속을 했는데....”
이제 10m가 남을 뿐이었다. 기철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이제 10m만 더 가면 인문대학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건물을 돌아서면 바로 주차장이었다. 낮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다.
“와 결혼까지요?.”
“응. 물론,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대로라면 몇 년 뒤에 결혼하지 않을까?.”
“그렇겠네요.”
5m. 마음속으로 기철이 거리를 잰다.
“그러면 엄청 서로 가깝겠네요?.”
“당연하지.”
“연인끼리 가까우면....”
기철이 말을 함과 동시에 그와 지연은 인문대학 건물 뒤편으로 돌아섰고, 이제는 더욱 더 어두운 주차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지연은 주차장을 가로 질러 대학교 후문으로 갈 생각이지만, 기철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 가까우면 섹스도 많이 했겠네요?.”
“... 뭐... 뭐라고?.”
지연은 갑작스런 기철의 말에 당황을 했고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지연을 보고 기철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왜 놀라요?. 남자친구 자지가 누나 보지를 많이 박아봤냐고 물어 본 것 뿐 인데?. 남자친구 생각하면 보지가 벌렁벌렁 하지 않아요?.”
“너... 너...”
지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기철을 외면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뒤를 돌아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기철은 바로 지연을 뒤에서 안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보지가 벌렁 벌렁하지?. 내 자지 맛 좀 보지 그래?. 이 갈보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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