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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방 -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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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만큼은 현우의 옆에 있는 것도 버겁다. 민호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부스스 일어나서 팬티만 걸치고 옷가지를 주워들었다. 손에 든 옷으로 젖가슴을 가리고 주방으로 향한다. 거실로 향하는 비밀의 문을 나서기 위해서다. 묵묵하게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의 목소리가 등 뒤로부터 들린다.
“내일 모레야! 이틀 후 내방으로 다섯 시까지........!”
그의 목소리가 악마의 음성처럼 귓가에 메아리친다. 거실로 돌아와 보니 민호가 혼자 세면장 안에서 놀고 있었다. 물장난을 하고 있었는데 거실이 물바다가 되어 있다. 들고 온 옷을 걸쳐 입고 걸레질을 하면서 생각한다. 인간의 번민과 욕망도 걸레질을 하듯이 닦아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민호를 씻기고 간식으로 빵과 우유를 주었다. 왠지 오늘따라 현우가 뿜어낸 몸속의 분비물을 느끼며 소름이 끼친다. 세면장으로 들어가 세수 대야에 물을 가득 받는다. 팬티를 벗어던지고 세수 대야를 깔고 앉았다. 세척제를 음부에 뿌리고 북북 문질러 닦는다. 상쾌한 기분 보다는 짜릿한 감각을 느낀다.
팬티를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해가 저무는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이 잔득 끼었던 하늘에 석양이 깃들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현우의 음성이 귓가에 왕왕 거린다. 이틀 후 내방으로 다섯 시까지라는 말이 되 내어진다. 내가 처 놓은 올가미에 내가 스스로 걸려든 기분이다. 흔들어 지우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
사랑하는 애인을 잃어버리는 현우의 심정을 다시 생각한다. 원인이 어찌했던 내가 저지른 일이다. 그는 사랑하는 은정이 다른 남자의 욕구를 채우는 재물이 되는 현장을 보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애인을 닮은 여자를 상대로 욕구를 푸는 것으로 고통의 집념을 떨쳐 버리려고 한다. 어쩌면 나에게서 멀어지려고 내가 승낙할 수 없는 부탁을 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의 허기짐을 채워주는 그가 필요하다. 내 곁에 있도록 현우의 고통을 덜어줄 묘안을 떠 올린다. 어쩌면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다. 채무를 갚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미영의 눈물이 글썽거리는 간절한 모습이 떠오른다. 현우의 부탁이 가능하다면 미영의 채무를 갚아 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남편 하나만을 남자라고 여기고 사는 미영이 승낙할리도 없고, 현우의 부탁을 말할 수도 없다.
낙심을 하다가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 언젠가 미영이가 고백한 말이 떠오른다. 미영이가 남자와 관계를 한 것은 남편뿐이 아니었다. 결혼한 후에 친구들과 관광을 갔다가 술을 마시고 기분이 들떠서 어떤 남자와 하룻밤을 동침하면서 육체관계를 했다는 말이었다. 남편과의 부부관계보다 황홀한 정사였다는 고백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나는 두 사람을 위해 돈을 내놓고, 현우는 미영을 통해 은정을 잊어버리는 대신 나를 선택하고, 미영은 순간의 희생으로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내 나름대로의 판단을 한다.
일단 미영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렇지만 막상 미영에게 전화를 하려고 수화기를 들었으나 전화번호를 누를 수 없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더욱 혼란스러워 한다. 미영에 대한 발상을 포기하면 현우도 포기해야 한다. 현우를 포기한다는 것은 또 다른 아픔이다. 남편에 대한 원망도 힘든데, 닥쳐올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지 못 할 것 같다. 공연히 집안을 배회한다. 늦게까지 망설이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미영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미영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현우를 포기해야하는지 갈림길에서 헤맨다. 민호가 어지럽힌 거실 청소를 해야 한다. 진공청소기를 들고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기의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혼미하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청소기 소리에 대문이 열리는 소리도 못 들었던 모양이다. 돌아보려는데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언니 청소하나봐.”
미영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다. 그렇지 않아도 궁리중인데 어쨌든 미영을 보니 반갑다. 청소기 스위치를 끄고 그녀를 맞이한다. 미영이 미장원에 다녀 온 것을 알 수 있다. 짧게 커트를 친 머리가 그녀를 나이보다 더욱 앳되어 보이게 한다. 전화만 하던 그녀가 방문 한 사유를 생각한다. 아무래도 상환기일이 임박한 부채 때문에 온 것 같다. 현우의 부탁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
“요즘 바쁜 모양이다. 커피 줄까?”
“응, 언니 커피 한잔 줘.”
힘들어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가 민호에게 두 팔을 벌린다. 거실 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던 민호가 방긋방긋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가 안긴다. 아이가 없는 그녀는 민호를 끔찍하게 좋아한다. 민호도 그녀를 좋아한다. 그녀는 가슴에 안기는 민호를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토닥인다.
“우리 민호! 잘 있었어. 애궁!”
“이모! 헤헤......”
사랑을 받는 민호가 무척 기분이 좋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목에 매달린다. 커피를 탄 찻잔을 그녀 앞 탁자 위에 놓고 마주 앉았다. 문득 현우가 왜 그녀와 같은 타입을 좋아하는지 궁금해진다. 미영의 귀염성 있는 자그마한 얼굴과 아담한 젖가슴을 보며 여자로서 조금은 질투심이 일어난다. 스커트 밑으로 뻗친 매끈한 종아리의 뽀얀 피부에서 윤기가 흐른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녀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연다.
“언니 어떻게 해........?”
“글쎄, 나도 갖은 돈이 없어서 알아보긴 했는데........”
짙은 눈썹을 깜박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넘칠 것 같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망설인다. 머릿속에는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하는지 갈팡질팡한다. 그녀가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다음 말을 독촉한다.
“안되면 나는 못 살아. 어떡해, 언니! 방법은 있는 거야?”
“사실은.......너한테 전화를 해야 하는가를 망설였어.”
울먹거리는 미영에게 속 시원히 말하기가 거북하다. 당장 내가 돈이 없어도 내 앞으로 대출을 받아 주어도 되는 것이다. 미영은 그 방법을 떠 올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면서도 말로는 표현하지 못한다.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가 내 말을 반복한다.
“사실이 뭔데!?”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괜찮아, 언니와 나 사이에 어떤 말도 이해 못하나!? 부채만 값을 수 있다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차마 입을 열기가 두렵구나. 정말 어떤 말과 방법도 오해하지 않겠니?”
“괜찮아, 부채를 갚지 못한다고 해도, 언니가 나를 위해 노력해 준 것만으로 고마워.”
“사실은 누가 너를 관심 있게 보는 남자가 있어........”
“나를 관심.......!?”
나를 바라보는 미영의 동그란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내말을 듣고 그녀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 말의 의미를 대강 알 수 있는지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그녀가 공연히 가슴을 여미면서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 남자에게 네가 힘들어 하는 것을 말했더니, 한번만 동침을 해주면 빚을 갚을 돈을 다른 조건 없이 준다는데 어떡하니.......? 그것도 선불로.”
“...........!”
생각한데로 그녀는 충격을 받았는지 침묵했다. 탁자위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애틋하다.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지 못할 만큼 그녀가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느낀다. 미영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주르륵 떨어졌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 이 아리게 저며 든다. 할 수 있다면 그녀에게 한 말을 삼키고 없던 일로 하고 싶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말이고, 그녀의 판단에 맡기는 방법밖에 없다.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뺨에 흐른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물었다.
“누구인데......?”
“뒷방에 총각! 아버지가 외교관이고 부유한 집안인가 봐.”
그녀가 다시 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이 혹시 현우와 나 사이를 의심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든다. 다시 시작되는 정적 같은 침묵이 고역스러웠다. 그녀가 나에 대한 의문을 갖기 전에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다.
“평소에 얌전한 총각인데, 너를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나한테 말하는 것도 두려운지 내일 다섯 시까지 기다리는데 시간이 지나면 없던 걸로 하자는구나.”
“.........!?”
그녀가 다시 생각에 잠긴다.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한지 불쑥 일어나 창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앉더니 민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묻는다.
“민호야! 아침에 맛있는 거 먹었니?”
“응, 짜파게티.”
“애구! 짜파게티가 맛있었어?”
“헤헤! 응. 이모도 줄까?”
“아니 이모는 밀가루 음식 싫어 해.”
대답을 하지 않고 민호에게 관심을 보이는 그녀의 심중을 알 수 없다. 민호와 말을 하던 그녀가 텔레비전 리모컨을 들고 전원 스위치를 누른다. 테너 가수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하는 장면이 화면에 나온다. 다른 채널을 돌리니 연예가 프로그램이다. 그녀는 알고 있는 연예계 탤런트 사생활을 나에게 말한다,
그녀에게 대답을 독촉할 수도 없어 기다린다. 그녀가 말을 의미 없이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지루함을 느낄 것 같으면 그녀가 화제를 꺼낸다. 그녀는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 있다. 한동안 앉아 있던 그녀가 일어섰다.
“언니 갈게. 고마워.”
“갈래? 어떡하니 도움이 안 돼서.......”
거실을 나서 하이힐을 신느라고 엎드린 미영에게 걱정스러운 말투를 흘렸다. 하이힐을 신고 일어선 그녀가 머뭇거린다. 그녀가 대답 없이 그냥 가버리면 나는 더욱 혼란스러울 것이다. 민호에게 미소로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현관문을 나서려다 뒤돌아선다.
“언니, 집에 가서 전화할게.”
“하이힐이 예쁘다.”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에게 엉뚱한 말로 대신한다. 또닥거리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그녀가 대문을 향해 걸어간다. 어째서인지 스커트 위에 들어난 그녀의 엉덩이의 흔들림이 무척이나 성적인 매력이 넘쳐 보인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는 또 다른 기다림을 해야 한다. 남편을 기다렸던 나를 시험하는지도 모른다. 미영의 대답을 기다려야하는 마음은 답답하다. 밤이 이슥해서 잠을 청하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미영에게서 온 전화였다.
“미안해, 언니 잠든 걸 깨웠지?”
“아니, 아직야.”
“내일 몇 시라고 했지?”
“다섯 시라고 말하지 않았나!?”
“알았어.......언니. 잘 자.”
미영이 결심을 한 모양이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끈 질투심이 생긴다. 같은 여자로서 미영을 소유하고 싶은 현우가 원망스럽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일이고 내 곁에 머물기 위한 현우의 선택일 것이라고 자위를 한다. 잠을 청했으나 자꾸만 미영의 벌거벗은 알몸을 안고 헐떡거리는 현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현우의 가슴에 안겨 애무를 받는 미영이 어떤 표정을 할런지 상상을 한다.
간신히 잠이 들려고 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났다.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는데 대문의 철창 사이로 승용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대문 앞에선 남자와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무슨 말인가 주고받는다. 술 취한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술을 마신 남편을 부하직원이 데려다 주는 모양이다.
인터폰에 붙은 대문 잠금장치 스위치를 누르고 소파에 웅크리고 앉는다. 술에 취한 발자국소리, 현관문 여닫는 소리에 이어 남편의 흔들리는 그림자가 내 앞에 길게 들이운다. 나는 쿠션을 끌어안은 채 고개도 들어 보지 않았다. 남편의 모습조차도 보기 싫었다. 남편에게서 술 냄새가 역하게 풍겨온다. 잠시 나를 내려다보던 남편이 중얼거린다.
“사람이 왔는데 고개도 들어 보지 않아.”
“..........!?”
치미는 분노에 나를 사람 취급했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그 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기에 꿀꺽 삼키고 만다. 남편이 옷을 갈아입고 세면을 하느라고 침실과 세면장을 드나들었다. 문 여닫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돌부처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나를 힐끗 바라 본 남편이 침실로 들어가고 정적이 감돌았다. 거실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도 소파에 웅크리고 앉는다. 무인도에 표류한 나그네처럼 무섭도록 고요한 어둠이 내려 앉아 있다. 갑자기 온 몸에 서릿발 같은 한기를 느낀다. 이런 날은 남편이 같이 잠자리에 들어가자는 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밉고 저주스러워도 남편의 포옹을 받으며 따스함을 느끼고 싶다.
나는 기어코 거실의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몸이 으스스하여 눈을 뜨니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이른 아침이다. 침실 문을 열어보니 남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나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진 남편이 새삼스럽게 야속하다. 남편이 벗어 놓은 속내의를 집어 드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바보, 멍청이, 나쁜 놈. 등등 남편에 대한 온갖 욕설을 중얼거린다.
집안일을 마친 후에 민호를 데리고 가까운 대형마트로 쇼핑을 나갔다. 생필품 몇 가지를 구입하고 패스트 푸드점에서 민호와 간단한 점심식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은행에 들려 미영이에게 줄 돈을 수표로 인출해서 봉투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와 미영이가 오기를 기다린다. 미영이가 올 시간이 가까울수록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현우의 동태를 살피러 뒷방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이 나지만 내 느낌 탓인지 몰라도 조용하고 긴장감이 감돈다. 식사라도 챙겨 먹었는지 염려된다. 방으로 들어가 물어보고 싶지만 오늘만은 방관하고 싶다. 약속시간보다 이십 여분 빠르게 미영의 모습이 나타났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의 발걸음이 왠지 불안해 보인다, 허공을 짚는듯하더니 발목이 휘청거린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은 변함이 없으나 어딘가 그림자가 들어나 보인다. 달라진 모습이라면 진한 립스틱을 칠하고 감색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블라우스에 붙은 스카프로 목을 감싼 것이 돋보인다.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은 그녀는 되도록 평상시 밝은 표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다.
“언니, 집에만 있었어?”
“응, 생필품 사러 쇼핑하고 왔지.”
놀고 있던 민호가 미영에게 달려든다. 무릎위에 민호를 앉힌 그녀가 민호의 볼에 입맞춤을 한다. 왠지 그녀를 대하기가 서먹서먹하다. 그녀도 나와 같은 기분인 모양이다. 두서없는 화제를 끄집어낸다.
“우리 옆집에 노인네 부부가 살고 있는데, 어제 할아버지가 돌아 가셨어. 그런데 할머니가 어찌나 슬피 우는지 정말 가슴 아팠어.”
“자식이 없나?”
“아들이 둘 있는데, 외국 나가 있데. 그런걸 보면 자식은 그냥 자식은 키우는 재미일 뿐인 것 같아. 부모의 인생과 자식의 인생은 번지수가 다른가봐.”
그녀와 나에게는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야기 소재가 떨어지고 나니 다시 서먹해진다. 방으로 들어가서 핸드백에 넣어놓은 돈 봉투를 꺼냈다. 미영이 앞의 탁자에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바라보는 미영의 눈빛이 흔들린다.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은 그녀의 눈망울에 습기가 어린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봉투를 집어 자신의 작은 손가방에 넣는다. 그녀와 나는 말없이 침묵한다. 이따금 마주치는 서로의 시선이 버겁다. 나에게 온 목적이 단순한 그녀를 현우에게 데려다 줘야한다. 기다리고 있을 현우의 모습을 상상한다. 마치 뚜쟁이가 된 것 같은 나 자신이 추악해 보인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쳐다본다. 말이 필요 없는 걸 그녀도 잘 안다. 그녀가 따라서 일어 선다. 현우의 방으로 통하는 거실 문으로 들어가려다가 현관으로 향한다. 거실로 통하는 문은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기에 미영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현관을 나서 집 뒤로 돌아갔다.
현우의 방으로 통하는 현관문을 열려고 하다가 멈춰 선다. 등 뒤로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는 미영을 의식한다. 자격지심인가, 자유스럽게 현우의 방을 드나든다는 느낌을 미영에게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새삼스럽게 현관문을 두드린다. 현우의 대답 소리를 듣고 나서야 현관문을 연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니 방문이 열리고 현우의 모습이 나타난다.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항상 걸치던 편한 복장을 한 그의 표정이 굳어 있다. 방문을 열어준 그가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로 향한다. 방안으로 들어서서 뒤를 돌아본다. 현관 문 안으로 들어선 미영이가 따라 들어오려다가 멈칫거린다.
미영의 눈길이 방안을 휘둘러본다. 그녀와 현우의 시선이 마주치는 것 같다. 그녀를 바라보는 현우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녀를 바라보던 현우의 시선이 나를 의식한다. 나를 향한 현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마치 어린아이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겁먹은 눈빛이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이내 외면을 한다.
현우와 눈빛을 마주쳤던 미영이 고개를 숙이고 방안으로 들어선다. 방안으로 들어선 미영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다. 그녀에게 짤막하게 소파에 앉으라고 말한다. 현우의 맞은편 소파로 다가가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천근같이 무거워 보인다. 스커트 자락을 감싸며 다소곳이 앉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할 일을 마친 사람처럼 길게 한숨을 들이켰다가 내쉰다.
현우와 미영이 힐끔거리며 서로를 훔쳐보는 것을 보고 돌아선다. 내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는 내 다리가 공연히 후들거리고 떨린다. 빠른 걸음으로 내 집 거실로 들어왔다. 거실 소파에 앉은 내 시선은 현우의 방으로 향한다.
잘 놀고 있던 민호가 잠이 오는지 갑자기 투정을 한다. 민호를 가슴에 안고 토닥거리니 이내 눈을 스르르 감고 잠이 든다. 현우와 미영이 알몸으로 엉키어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잠결에 민호가 젖가슴을 더듬는다. 어린 아들의 손길인데 미감한 세포가 스멀스멀 살아나고 짜릿하다.
현우의 방으로 향한 내 마음은 질투와 호기심으로 끓어오른다. 숨소리를 고르게 흘리는 민호를 침실로 안고 가서 침대 위에 눕혔다. 갑자기 내 발걸음이 고양이처럼 조심스러워지며 바빠진다. 거실 뒤편의 현우의 방으로 향하는 나만의 문 앞에 선다. 문을 살그머니 밀고 귀를 기울인다. 어찌된 것인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소리 없이 문을 밀고 들어서는데 내 가슴 속의 심장 박동 소리가 커진다. 하지만 현우의 방에서 보이지 않는 주방이기에 안심한다. 싱크대 옆을 지나 한발자국씩 걸음을 옮긴다. 방과 통하는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방안을 훔쳐본다. 주방 입구의 커튼 사이로 소파에 앉는 미영의 등이 보인다.
어찌된 일인지 방안에는 침묵이 흐르고 이따금 현우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영을 이따금 바라본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현우가 미영에게 ‘미안해요!’라고 한다. 현우가 미영의 옆으로 옮겨 앉는다. 그리고 미영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그의 가슴으로 끌려가지 않으려는 미영의 태도가 분명하다. 꼿꼿하게 앉아 버티는 미영을 현우가 와락 끌어안는다. 그리고 미영의 입술을 찾는다. 미영이 달려드는 그의 얼굴을 밀치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해요. 입술은 싫어.”
“........!?”
계면쩍은 표정을 짓는 현우를 미영이 흘끔 쳐다본다. 그리고 일어서서 침대로 다가간 미영이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스타킹을 벗고 감정이 없는 표정으로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벗어 차곡차곡 싸놓은 그녀가 주춤거린다.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의 미영의 자태가 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앙증맞게 느껴진다.
소파에 앉아 바라보던 현우가 슬며시 일어나 미영에게 다가간다. 그는 미영의 등 뒤로 다가가서 브래지어의 호크를 풀어준다. 미영의 윤기가 흐르는 등을 손으로 쓰다듬는다. 석고상처럼 표정이 없는 미영이 팬티를 벗는 모습을 보고 현우가 헐렁한 티셔츠를 머리 위까지 끌어올려 벗는다. 현우의 상체가 들어나며 근육이 꿈틀 거린다.
완연하게 알몸이 들어난 미영의 몸매는 작은 요정 같았다. 현우가 미영의 알몸을 번쩍 들어 침대 위에 눕힌다. 침대로 들어간 미영이 침대 모포를 젖가슴까지 끌어당기고 눈을 감는다.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현우가 자신의 반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어 던진다. 역시 나체가 된 현우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숨어서 훔쳐보고 있는 나를 의식하지 못한다.
침대로 들어간 현우가 미영이 덮고 있는 침대모포를 벗겨냈다. 아담한 젖가슴과 보기 좋게 통통한 허벅지 사이가 고스란히 들어나 보인다. 빗질을 한 것처럼 가지런한 음모 밑으로 진홍빛의 음순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알몸을 들어낸 미영은 눈을 감고 있었다. 결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남편이 있는 여자에게 순결이란 정신이다. 그녀는 아마도 이순간만은 자신의 몸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한남자의 욕망에서 흘려내는 분비물을 받아내는 도구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래서 순결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잠시 자신의 몸을 빌려주고 남편과의 행복을 찾으려는 것이기에 절대로 쾌감을 느끼지 않으려는 미영의 마음이 엿보인다.
미영의 나신을 내려다보는 현우의 페니스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현우가 미영의 젖가슴을 보듬어 안는다. 젖꼭지를 입술로 물고 한손으로 미영의 음부를 더듬는다. 미영의 젖가슴과 목덜미, 그리고 배꼽과 허리가 현우의 타액으로 적신다. 현우는 아마도 미영이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미영은 여전히 무감각한 표정으로 꼿꼿하게 누워 있다.
[다음편에....]
“내일 모레야! 이틀 후 내방으로 다섯 시까지........!”
그의 목소리가 악마의 음성처럼 귓가에 메아리친다. 거실로 돌아와 보니 민호가 혼자 세면장 안에서 놀고 있었다. 물장난을 하고 있었는데 거실이 물바다가 되어 있다. 들고 온 옷을 걸쳐 입고 걸레질을 하면서 생각한다. 인간의 번민과 욕망도 걸레질을 하듯이 닦아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민호를 씻기고 간식으로 빵과 우유를 주었다. 왠지 오늘따라 현우가 뿜어낸 몸속의 분비물을 느끼며 소름이 끼친다. 세면장으로 들어가 세수 대야에 물을 가득 받는다. 팬티를 벗어던지고 세수 대야를 깔고 앉았다. 세척제를 음부에 뿌리고 북북 문질러 닦는다. 상쾌한 기분 보다는 짜릿한 감각을 느낀다.
팬티를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해가 저무는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이 잔득 끼었던 하늘에 석양이 깃들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현우의 음성이 귓가에 왕왕 거린다. 이틀 후 내방으로 다섯 시까지라는 말이 되 내어진다. 내가 처 놓은 올가미에 내가 스스로 걸려든 기분이다. 흔들어 지우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
사랑하는 애인을 잃어버리는 현우의 심정을 다시 생각한다. 원인이 어찌했던 내가 저지른 일이다. 그는 사랑하는 은정이 다른 남자의 욕구를 채우는 재물이 되는 현장을 보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애인을 닮은 여자를 상대로 욕구를 푸는 것으로 고통의 집념을 떨쳐 버리려고 한다. 어쩌면 나에게서 멀어지려고 내가 승낙할 수 없는 부탁을 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의 허기짐을 채워주는 그가 필요하다. 내 곁에 있도록 현우의 고통을 덜어줄 묘안을 떠 올린다. 어쩌면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다. 채무를 갚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미영의 눈물이 글썽거리는 간절한 모습이 떠오른다. 현우의 부탁이 가능하다면 미영의 채무를 갚아 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남편 하나만을 남자라고 여기고 사는 미영이 승낙할리도 없고, 현우의 부탁을 말할 수도 없다.
낙심을 하다가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 언젠가 미영이가 고백한 말이 떠오른다. 미영이가 남자와 관계를 한 것은 남편뿐이 아니었다. 결혼한 후에 친구들과 관광을 갔다가 술을 마시고 기분이 들떠서 어떤 남자와 하룻밤을 동침하면서 육체관계를 했다는 말이었다. 남편과의 부부관계보다 황홀한 정사였다는 고백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나는 두 사람을 위해 돈을 내놓고, 현우는 미영을 통해 은정을 잊어버리는 대신 나를 선택하고, 미영은 순간의 희생으로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내 나름대로의 판단을 한다.
일단 미영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렇지만 막상 미영에게 전화를 하려고 수화기를 들었으나 전화번호를 누를 수 없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더욱 혼란스러워 한다. 미영에 대한 발상을 포기하면 현우도 포기해야 한다. 현우를 포기한다는 것은 또 다른 아픔이다. 남편에 대한 원망도 힘든데, 닥쳐올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지 못 할 것 같다. 공연히 집안을 배회한다. 늦게까지 망설이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미영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미영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현우를 포기해야하는지 갈림길에서 헤맨다. 민호가 어지럽힌 거실 청소를 해야 한다. 진공청소기를 들고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기의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혼미하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청소기 소리에 대문이 열리는 소리도 못 들었던 모양이다. 돌아보려는데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언니 청소하나봐.”
미영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다. 그렇지 않아도 궁리중인데 어쨌든 미영을 보니 반갑다. 청소기 스위치를 끄고 그녀를 맞이한다. 미영이 미장원에 다녀 온 것을 알 수 있다. 짧게 커트를 친 머리가 그녀를 나이보다 더욱 앳되어 보이게 한다. 전화만 하던 그녀가 방문 한 사유를 생각한다. 아무래도 상환기일이 임박한 부채 때문에 온 것 같다. 현우의 부탁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
“요즘 바쁜 모양이다. 커피 줄까?”
“응, 언니 커피 한잔 줘.”
힘들어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가 민호에게 두 팔을 벌린다. 거실 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던 민호가 방긋방긋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가 안긴다. 아이가 없는 그녀는 민호를 끔찍하게 좋아한다. 민호도 그녀를 좋아한다. 그녀는 가슴에 안기는 민호를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토닥인다.
“우리 민호! 잘 있었어. 애궁!”
“이모! 헤헤......”
사랑을 받는 민호가 무척 기분이 좋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목에 매달린다. 커피를 탄 찻잔을 그녀 앞 탁자 위에 놓고 마주 앉았다. 문득 현우가 왜 그녀와 같은 타입을 좋아하는지 궁금해진다. 미영의 귀염성 있는 자그마한 얼굴과 아담한 젖가슴을 보며 여자로서 조금은 질투심이 일어난다. 스커트 밑으로 뻗친 매끈한 종아리의 뽀얀 피부에서 윤기가 흐른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녀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연다.
“언니 어떻게 해........?”
“글쎄, 나도 갖은 돈이 없어서 알아보긴 했는데........”
짙은 눈썹을 깜박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넘칠 것 같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망설인다. 머릿속에는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하는지 갈팡질팡한다. 그녀가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다음 말을 독촉한다.
“안되면 나는 못 살아. 어떡해, 언니! 방법은 있는 거야?”
“사실은.......너한테 전화를 해야 하는가를 망설였어.”
울먹거리는 미영에게 속 시원히 말하기가 거북하다. 당장 내가 돈이 없어도 내 앞으로 대출을 받아 주어도 되는 것이다. 미영은 그 방법을 떠 올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면서도 말로는 표현하지 못한다.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가 내 말을 반복한다.
“사실이 뭔데!?”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괜찮아, 언니와 나 사이에 어떤 말도 이해 못하나!? 부채만 값을 수 있다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차마 입을 열기가 두렵구나. 정말 어떤 말과 방법도 오해하지 않겠니?”
“괜찮아, 부채를 갚지 못한다고 해도, 언니가 나를 위해 노력해 준 것만으로 고마워.”
“사실은 누가 너를 관심 있게 보는 남자가 있어........”
“나를 관심.......!?”
나를 바라보는 미영의 동그란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내말을 듣고 그녀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 말의 의미를 대강 알 수 있는지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그녀가 공연히 가슴을 여미면서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 남자에게 네가 힘들어 하는 것을 말했더니, 한번만 동침을 해주면 빚을 갚을 돈을 다른 조건 없이 준다는데 어떡하니.......? 그것도 선불로.”
“...........!”
생각한데로 그녀는 충격을 받았는지 침묵했다. 탁자위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애틋하다.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지 못할 만큼 그녀가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느낀다. 미영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주르륵 떨어졌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 이 아리게 저며 든다. 할 수 있다면 그녀에게 한 말을 삼키고 없던 일로 하고 싶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말이고, 그녀의 판단에 맡기는 방법밖에 없다.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뺨에 흐른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물었다.
“누구인데......?”
“뒷방에 총각! 아버지가 외교관이고 부유한 집안인가 봐.”
그녀가 다시 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이 혹시 현우와 나 사이를 의심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든다. 다시 시작되는 정적 같은 침묵이 고역스러웠다. 그녀가 나에 대한 의문을 갖기 전에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다.
“평소에 얌전한 총각인데, 너를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나한테 말하는 것도 두려운지 내일 다섯 시까지 기다리는데 시간이 지나면 없던 걸로 하자는구나.”
“.........!?”
그녀가 다시 생각에 잠긴다.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한지 불쑥 일어나 창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앉더니 민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묻는다.
“민호야! 아침에 맛있는 거 먹었니?”
“응, 짜파게티.”
“애구! 짜파게티가 맛있었어?”
“헤헤! 응. 이모도 줄까?”
“아니 이모는 밀가루 음식 싫어 해.”
대답을 하지 않고 민호에게 관심을 보이는 그녀의 심중을 알 수 없다. 민호와 말을 하던 그녀가 텔레비전 리모컨을 들고 전원 스위치를 누른다. 테너 가수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하는 장면이 화면에 나온다. 다른 채널을 돌리니 연예가 프로그램이다. 그녀는 알고 있는 연예계 탤런트 사생활을 나에게 말한다,
그녀에게 대답을 독촉할 수도 없어 기다린다. 그녀가 말을 의미 없이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지루함을 느낄 것 같으면 그녀가 화제를 꺼낸다. 그녀는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 있다. 한동안 앉아 있던 그녀가 일어섰다.
“언니 갈게. 고마워.”
“갈래? 어떡하니 도움이 안 돼서.......”
거실을 나서 하이힐을 신느라고 엎드린 미영에게 걱정스러운 말투를 흘렸다. 하이힐을 신고 일어선 그녀가 머뭇거린다. 그녀가 대답 없이 그냥 가버리면 나는 더욱 혼란스러울 것이다. 민호에게 미소로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현관문을 나서려다 뒤돌아선다.
“언니, 집에 가서 전화할게.”
“하이힐이 예쁘다.”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에게 엉뚱한 말로 대신한다. 또닥거리는 하이힐 소리를 내며 그녀가 대문을 향해 걸어간다. 어째서인지 스커트 위에 들어난 그녀의 엉덩이의 흔들림이 무척이나 성적인 매력이 넘쳐 보인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는 또 다른 기다림을 해야 한다. 남편을 기다렸던 나를 시험하는지도 모른다. 미영의 대답을 기다려야하는 마음은 답답하다. 밤이 이슥해서 잠을 청하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미영에게서 온 전화였다.
“미안해, 언니 잠든 걸 깨웠지?”
“아니, 아직야.”
“내일 몇 시라고 했지?”
“다섯 시라고 말하지 않았나!?”
“알았어.......언니. 잘 자.”
미영이 결심을 한 모양이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끈 질투심이 생긴다. 같은 여자로서 미영을 소유하고 싶은 현우가 원망스럽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일이고 내 곁에 머물기 위한 현우의 선택일 것이라고 자위를 한다. 잠을 청했으나 자꾸만 미영의 벌거벗은 알몸을 안고 헐떡거리는 현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현우의 가슴에 안겨 애무를 받는 미영이 어떤 표정을 할런지 상상을 한다.
간신히 잠이 들려고 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났다.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는데 대문의 철창 사이로 승용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대문 앞에선 남자와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무슨 말인가 주고받는다. 술 취한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술을 마신 남편을 부하직원이 데려다 주는 모양이다.
인터폰에 붙은 대문 잠금장치 스위치를 누르고 소파에 웅크리고 앉는다. 술에 취한 발자국소리, 현관문 여닫는 소리에 이어 남편의 흔들리는 그림자가 내 앞에 길게 들이운다. 나는 쿠션을 끌어안은 채 고개도 들어 보지 않았다. 남편의 모습조차도 보기 싫었다. 남편에게서 술 냄새가 역하게 풍겨온다. 잠시 나를 내려다보던 남편이 중얼거린다.
“사람이 왔는데 고개도 들어 보지 않아.”
“..........!?”
치미는 분노에 나를 사람 취급했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그 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기에 꿀꺽 삼키고 만다. 남편이 옷을 갈아입고 세면을 하느라고 침실과 세면장을 드나들었다. 문 여닫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돌부처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나를 힐끗 바라 본 남편이 침실로 들어가고 정적이 감돌았다. 거실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도 소파에 웅크리고 앉는다. 무인도에 표류한 나그네처럼 무섭도록 고요한 어둠이 내려 앉아 있다. 갑자기 온 몸에 서릿발 같은 한기를 느낀다. 이런 날은 남편이 같이 잠자리에 들어가자는 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밉고 저주스러워도 남편의 포옹을 받으며 따스함을 느끼고 싶다.
나는 기어코 거실의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몸이 으스스하여 눈을 뜨니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이른 아침이다. 침실 문을 열어보니 남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나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진 남편이 새삼스럽게 야속하다. 남편이 벗어 놓은 속내의를 집어 드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바보, 멍청이, 나쁜 놈. 등등 남편에 대한 온갖 욕설을 중얼거린다.
집안일을 마친 후에 민호를 데리고 가까운 대형마트로 쇼핑을 나갔다. 생필품 몇 가지를 구입하고 패스트 푸드점에서 민호와 간단한 점심식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은행에 들려 미영이에게 줄 돈을 수표로 인출해서 봉투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와 미영이가 오기를 기다린다. 미영이가 올 시간이 가까울수록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현우의 동태를 살피러 뒷방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이 나지만 내 느낌 탓인지 몰라도 조용하고 긴장감이 감돈다. 식사라도 챙겨 먹었는지 염려된다. 방으로 들어가 물어보고 싶지만 오늘만은 방관하고 싶다. 약속시간보다 이십 여분 빠르게 미영의 모습이 나타났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의 발걸음이 왠지 불안해 보인다, 허공을 짚는듯하더니 발목이 휘청거린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은 변함이 없으나 어딘가 그림자가 들어나 보인다. 달라진 모습이라면 진한 립스틱을 칠하고 감색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블라우스에 붙은 스카프로 목을 감싼 것이 돋보인다.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은 그녀는 되도록 평상시 밝은 표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다.
“언니, 집에만 있었어?”
“응, 생필품 사러 쇼핑하고 왔지.”
놀고 있던 민호가 미영에게 달려든다. 무릎위에 민호를 앉힌 그녀가 민호의 볼에 입맞춤을 한다. 왠지 그녀를 대하기가 서먹서먹하다. 그녀도 나와 같은 기분인 모양이다. 두서없는 화제를 끄집어낸다.
“우리 옆집에 노인네 부부가 살고 있는데, 어제 할아버지가 돌아 가셨어. 그런데 할머니가 어찌나 슬피 우는지 정말 가슴 아팠어.”
“자식이 없나?”
“아들이 둘 있는데, 외국 나가 있데. 그런걸 보면 자식은 그냥 자식은 키우는 재미일 뿐인 것 같아. 부모의 인생과 자식의 인생은 번지수가 다른가봐.”
그녀와 나에게는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야기 소재가 떨어지고 나니 다시 서먹해진다. 방으로 들어가서 핸드백에 넣어놓은 돈 봉투를 꺼냈다. 미영이 앞의 탁자에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바라보는 미영의 눈빛이 흔들린다.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은 그녀의 눈망울에 습기가 어린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봉투를 집어 자신의 작은 손가방에 넣는다. 그녀와 나는 말없이 침묵한다. 이따금 마주치는 서로의 시선이 버겁다. 나에게 온 목적이 단순한 그녀를 현우에게 데려다 줘야한다. 기다리고 있을 현우의 모습을 상상한다. 마치 뚜쟁이가 된 것 같은 나 자신이 추악해 보인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쳐다본다. 말이 필요 없는 걸 그녀도 잘 안다. 그녀가 따라서 일어 선다. 현우의 방으로 통하는 거실 문으로 들어가려다가 현관으로 향한다. 거실로 통하는 문은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기에 미영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현관을 나서 집 뒤로 돌아갔다.
현우의 방으로 통하는 현관문을 열려고 하다가 멈춰 선다. 등 뒤로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는 미영을 의식한다. 자격지심인가, 자유스럽게 현우의 방을 드나든다는 느낌을 미영에게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새삼스럽게 현관문을 두드린다. 현우의 대답 소리를 듣고 나서야 현관문을 연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니 방문이 열리고 현우의 모습이 나타난다.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의 항상 걸치던 편한 복장을 한 그의 표정이 굳어 있다. 방문을 열어준 그가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로 향한다. 방안으로 들어서서 뒤를 돌아본다. 현관 문 안으로 들어선 미영이가 따라 들어오려다가 멈칫거린다.
미영의 눈길이 방안을 휘둘러본다. 그녀와 현우의 시선이 마주치는 것 같다. 그녀를 바라보는 현우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녀를 바라보던 현우의 시선이 나를 의식한다. 나를 향한 현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마치 어린아이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겁먹은 눈빛이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이내 외면을 한다.
현우와 눈빛을 마주쳤던 미영이 고개를 숙이고 방안으로 들어선다. 방안으로 들어선 미영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다. 그녀에게 짤막하게 소파에 앉으라고 말한다. 현우의 맞은편 소파로 다가가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천근같이 무거워 보인다. 스커트 자락을 감싸며 다소곳이 앉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할 일을 마친 사람처럼 길게 한숨을 들이켰다가 내쉰다.
현우와 미영이 힐끔거리며 서로를 훔쳐보는 것을 보고 돌아선다. 내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는 내 다리가 공연히 후들거리고 떨린다. 빠른 걸음으로 내 집 거실로 들어왔다. 거실 소파에 앉은 내 시선은 현우의 방으로 향한다.
잘 놀고 있던 민호가 잠이 오는지 갑자기 투정을 한다. 민호를 가슴에 안고 토닥거리니 이내 눈을 스르르 감고 잠이 든다. 현우와 미영이 알몸으로 엉키어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잠결에 민호가 젖가슴을 더듬는다. 어린 아들의 손길인데 미감한 세포가 스멀스멀 살아나고 짜릿하다.
현우의 방으로 향한 내 마음은 질투와 호기심으로 끓어오른다. 숨소리를 고르게 흘리는 민호를 침실로 안고 가서 침대 위에 눕혔다. 갑자기 내 발걸음이 고양이처럼 조심스러워지며 바빠진다. 거실 뒤편의 현우의 방으로 향하는 나만의 문 앞에 선다. 문을 살그머니 밀고 귀를 기울인다. 어찌된 것인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소리 없이 문을 밀고 들어서는데 내 가슴 속의 심장 박동 소리가 커진다. 하지만 현우의 방에서 보이지 않는 주방이기에 안심한다. 싱크대 옆을 지나 한발자국씩 걸음을 옮긴다. 방과 통하는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방안을 훔쳐본다. 주방 입구의 커튼 사이로 소파에 앉는 미영의 등이 보인다.
어찌된 일인지 방안에는 침묵이 흐르고 이따금 현우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영을 이따금 바라본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현우가 미영에게 ‘미안해요!’라고 한다. 현우가 미영의 옆으로 옮겨 앉는다. 그리고 미영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그의 가슴으로 끌려가지 않으려는 미영의 태도가 분명하다. 꼿꼿하게 앉아 버티는 미영을 현우가 와락 끌어안는다. 그리고 미영의 입술을 찾는다. 미영이 달려드는 그의 얼굴을 밀치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해요. 입술은 싫어.”
“........!?”
계면쩍은 표정을 짓는 현우를 미영이 흘끔 쳐다본다. 그리고 일어서서 침대로 다가간 미영이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스타킹을 벗고 감정이 없는 표정으로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벗어 차곡차곡 싸놓은 그녀가 주춤거린다.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의 미영의 자태가 같은 여자인 내가 봐도 앙증맞게 느껴진다.
소파에 앉아 바라보던 현우가 슬며시 일어나 미영에게 다가간다. 그는 미영의 등 뒤로 다가가서 브래지어의 호크를 풀어준다. 미영의 윤기가 흐르는 등을 손으로 쓰다듬는다. 석고상처럼 표정이 없는 미영이 팬티를 벗는 모습을 보고 현우가 헐렁한 티셔츠를 머리 위까지 끌어올려 벗는다. 현우의 상체가 들어나며 근육이 꿈틀 거린다.
완연하게 알몸이 들어난 미영의 몸매는 작은 요정 같았다. 현우가 미영의 알몸을 번쩍 들어 침대 위에 눕힌다. 침대로 들어간 미영이 침대 모포를 젖가슴까지 끌어당기고 눈을 감는다.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현우가 자신의 반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어 던진다. 역시 나체가 된 현우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숨어서 훔쳐보고 있는 나를 의식하지 못한다.
침대로 들어간 현우가 미영이 덮고 있는 침대모포를 벗겨냈다. 아담한 젖가슴과 보기 좋게 통통한 허벅지 사이가 고스란히 들어나 보인다. 빗질을 한 것처럼 가지런한 음모 밑으로 진홍빛의 음순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알몸을 들어낸 미영은 눈을 감고 있었다. 결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남편이 있는 여자에게 순결이란 정신이다. 그녀는 아마도 이순간만은 자신의 몸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한남자의 욕망에서 흘려내는 분비물을 받아내는 도구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래서 순결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잠시 자신의 몸을 빌려주고 남편과의 행복을 찾으려는 것이기에 절대로 쾌감을 느끼지 않으려는 미영의 마음이 엿보인다.
미영의 나신을 내려다보는 현우의 페니스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현우가 미영의 젖가슴을 보듬어 안는다. 젖꼭지를 입술로 물고 한손으로 미영의 음부를 더듬는다. 미영의 젖가슴과 목덜미, 그리고 배꼽과 허리가 현우의 타액으로 적신다. 현우는 아마도 미영이 흥분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미영은 여전히 무감각한 표정으로 꼿꼿하게 누워 있다.
[다음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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