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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짓는 아내 - 2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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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실둥실 떠가는 뭉게구름. 도시 어딜 가나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콘크리트 건물은 푸른 하늘을 가리고, 사람들의 답답한 마음을 더욱 옥죈다.
“……하늘은 참 평화롭네.”
건물 사이로 보이는 작은 하늘에 위안을 얻기 위해 올려다보며 그 하늘에 닿길 바라는 듯이 뿌연 담배연기를 훅 내뿜어보는 이가 있다. 이 수많은 건물들에는 수많은 직장인들이 각자의 일에 종사하며 드문드문 일에 지친 직장인들이 잠시 야외 휴게실로 나와 담배를 뻐금뻐금 피우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풍경 속의 직장인.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전쟁터에서 잠시 피신 나온 그의 이름은 안정수다.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지치는 요일이 찾아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말에 푹 쉬지 못했던 것일까? 안정수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짙게 깔려있다.
“후우~정말이지. 일도 손에 안 잡히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담배를 의무적으로 태우고 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자꾸만 주말에 있었던 일에 정신이 팔리기 때문이다. 안정수는 주말을 계속해서 돌이켜 보며 결국 잠들어 버린 자신을 탓한다.
‘그것도 문제지만…….’
안정수는 그날 밤 잠들어버린 자신보다는 다음 날 아내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 한심한 자신을 탓하는 일보단 아내가 신경 쓰여서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묘하단 말이야…….”
그날 밤 아내와 김우영 부장이 몸을 섞은 건 확실하다. 그것도 상당히 진하게…….
그 때문인지 아침에 본 아내의 모습은 상당히 피곤함이 배어나왔다. 어색한 자신의 태도와 가랑이 사이에 하얗게 말라붙은 진한 정사의 흔적을 스스로 눈치 못 챌 정도로 피곤해 보이는 아내였다. 그럼에도 자신과 어디론가 놀러가고 싶어 했고, 결국에는 당일치기로 외출을 강행했다.
여기서 떠오르는 의문.
왜 아내는 굳이 자신과 외출을 하고 싶어 했을까? 물론 서먹하고 어색해진 부부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라고 덜렁이인 자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그 사실을 어필하며 힘껏 즐겼다.
‘…….’
굳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다음 날 부부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피곤함을 무릅쓰고 외출했다는 점이 안정수의 신경을 계속해서 건드렸다.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정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아내가 자신과 외출해서 거짓으로 즐거워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분명 굉장히 즐거워했지.’
오랜만에 보는 정말로 즐거운 아내의 미소.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며 점점 높아지는 자존심 때문인지, 그렇게 순수하게 즐기는 아내의 모습은 20대 이후 거의 보지 못했는데 마치 자신과 연애할 때의 그때처럼 그녀는 순수하게 즐거워했다.
“……후우우우.”
담배 연기를 토해낸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긴 숨을 토해내며 안정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답답한 의문을 토해낸다. 살을 부비고 살아도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알 도리가 없으니 안정수로써는 그녀의 이중된 모습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김우영의 품에 안겨 쾌락에 헐떡이는 아내의 미소와 자신의 품에 안겨 즐겁고 순수한 아내의 미소.
두 미소의 의미를 모르겠다.
그 미소의 의미를 아는 건 간단하다. 그냥 아내를 붙잡고 왜 그랬냐는 말 한마디.
딱 한 마디면 된다.
하지만 그 한 마디를 건넬 용기가 나질 않기에 몰래 지켜보기로 했거늘…….
“두 번째는 힘들겠지.”
김우영 부장의 대담함을 생각 못 한 게 안정수의 패착이다. 아무리 대담한 그여도 또 다시 집으로 초대하는 건 너무나 수상쩍어 할 것이다. 게다가 설마하니 남편이 있는 집에서 정말로 남의 아내를 탐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도 안 된다고 결론내고 마음 한 편으론 아내를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나 안도감을 느끼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감의 끈을 잠시 놓았더니 물밀 듯이 몰려오는 피로감에 컨디션을 조절 못 한 게 또 다른 가장 큰 패착이기도 하다.
“……쯧.”
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남자 아래 깔려 헐떡이는 모습을 기습적으로 들이밀어진 상태에서 본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쉬울 리 없다. 하지만 한 번 실패했기 때문일까? 마음 속 부글부글 끓던 질투심과 같은 뜨거운 감정은 많이 가라앉고 두 번의 실패를 막기 위해 한층 차분히 가라앉은 자신을 느끼고 있다.
“…….”
두 번의 실패를 없애기 위해 냉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주말에 아내와 외출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강하게 머릿속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다.
“이제는 그 방법을 써야하나?”
안정수는 이 방법만은 쓰기 싫었는데, 어떤 의미론 이 방법이 아내의 의도를 알아보는 것엔 틀림없다. 오히려 집에서 확인하는 방법보다 더욱 적합하다.
바로 김우영 부장과의 불장난.
자신이 아내에게 한 가장 큰 잘못인 하룻밤의 불장난.
분명 김우영 부장은 자신에게 그런 자리를 꼭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한 번으로 족할 그런 자리를 종종 이런 자리를 가지자고 구태여 말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그냥 상투적인 누구나가 하는 언제 한 번 저녁 먹자는 직장인들의 겉치레 같은 말. 물론 저녁 한 번 먹자는 말과는 괴를 달리하는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묘할 정도로 안정수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마치 이런 자리가 한 번 더 있을 것이란 걸 확신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이 약속 아닌 약속이 왜 가장 이 상황에 적합하냐고 하면……바로 그 하룻밤의 불장난의 대상이 아내가 될 수도 있다.
상대도 모르고, 그녀를 안는 자신도 상대방의 정체를 모르는 말도 안 되는 하룻밤의 불장난.
“하지만 그걸 가능케 한단 말이지…….”
지금 돌이켜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여자와는 미리 말을 맞춰놨을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여자도 상대방이 바뀌는 걸 모를 수 있는 상황.
그렇기에 안정수는 이 생각을 머릿속 한 편에 밀어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날 밤 아내의 의도를 확인하지 못했기에 이젠 아내 몰래 그녀의 의도를 확인하기엔 이것 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아니, 이 방법이 좋다고 그의 가슴 속 작지만 깊게 뿌리내린 배덕감이 자신에게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처럼 자신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만약 그런 자리에 아내가 나온다면? 그 자리에 나오기 위해 아내는 김우영 부장과 미리 말을 맞췄을까? 아니면 자신이 믿고 싶은 것처럼 사랑하는 아내는 그 자리에 억지로 불려나온 것일까?
“꿀꺽…….”
안정수는 손에 쥔 담배가 서서히 타들어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머릿속에 떠오른 아내의 모습에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걸 느끼며 마른침을 삼켜보지만 갈증은 더해져만 간다.
“동시에 아내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겠지.”
아내가 그런 자리에 안 나온다는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얼마 전 자신이 마련한 무대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올라가는 김우영의 모습에서 확신을 했다. 그라면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자기 물건을 과시하듯이 자신이 제안한 무대에 아내를 끌고 나올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확인하고 싶은 아내의 의도는 그때 확실히 밝혀질 것이다.
미리 말을 맞추고 나왔을 것이냐, 모르고 나왔을 것이냐…….
자신은 아내의 반응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모르겠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두근거림과 긴장으로 인해 몸이 뻣뻣하게 굳는 걸 보면 아직도 자신은 망설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다시 한 번 그 자리에 자신이 선다면 억눌렀던, 외면했던 감정이 봇물 터지듯 넘쳐흐를 건 확실하다.
“하지만 김우영 부장은…….”
다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그를 떠올린다. 야외 휴게실로 나오며 스쳐지나가듯 보았던 그의 텅 빈 부장 자리.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자리를 비웠다.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그의 행동이지만 텅 빈 그 자리를 볼 때마다 아내를 만나러 간 건 아닐까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다.
“후우…….”
안정수는 작은 한숨을 쉬며 품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적인다. 수많은 연락처 중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메롱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
아내의 전화번호다.
눈매 사나운 마귀할멈이라고 저장해둔 걸 아내에게 들켜 등짝을 시원하게 얻어맞은 뒤 그녀가 바꿔준 이름이다. 서로 사람 만나는 일을 하기에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연락하는 걸 자제하는 게 암묵적인 룰이 되어버렸다. 지금에 이르러선 이 암묵적인 룰 때문에 연락하는 것에도 작은 용기가 필요할 정도다. 메롱이라 적혀있는 연락처에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걸까?
“…….”
겨우 전화 한 통. 이런 것에 망설이고 있는 걸 보면 자신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서로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에 너무 기대고 있었던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안정수는 자꾸만 마르는 입 때문에 갈증을 해소하듯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절전 기능 때문에 자꾸만 꺼지는 스마트 폰 액정을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액정 위에 굳은 것처럼 영원히 움직이지 않던 손가락이 파란 전화 표시를 꾹 누른다.
“…….”
경쾌한 효과음과 동시에 통화가 연결되는 연결음이 스마트 폰에서 흘러나온다. 짧은 연결음이 한 번 울릴 때마다 안정수의 가슴의 고통은 더욱 커지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 자신의 손가락을 말리느라 고역이다. 연결되지 않는 스마트 폰 액정을 외면하듯이 그는 푸른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려버린다.
안정수의 손아귀에 쥔 스마트 폰에서 흘러나오는 통화 연결음이 고통이라도 주는 것처럼 그의 손은 움찔거리며 통화 종료 버튼 위에서 까딱거린다.
10초가 이렇게 길었던가? 지금 통화를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난거지?
안정수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도 귓가에 울리는 통화 연결음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흘러가는 시간에 압사 당할 것처럼 긴장이 고조된다.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은 이 긴장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듯 스마트 폰 액정 위에서 다른 생물처럼 움찔거린다.
“…….”
통화를 시작한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이제 곧 부재중일 때 흘러나오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건 아닐까? 역시 일이 바쁜 걸까? 주말이 아니어도 근래 굉장히 일이 피곤해 보이긴 했는데…….
온갖 추측과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귓가에 울리는 통화 연결음을 더 이상 참기 힘든 것처럼 경련하듯 움찔거리던 그의 손가락은 계속되는 통화 연결음이 끝나는 순간에 맞춰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눌러버린다.
“하아…….”
자신의 의지였을까? 아니면 자신을 옥죄는 통화 연결음을 견디기 힘든 손가락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기 멋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것일까?
안정수는 혼란스런 머리와 아직도 진정이 안 되는 가슴을 부여잡고 올려다보고 있던 푸른 하늘을 향해 길고 긴 한숨을 다시 한 번 토해내곤 일터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그의 주미니 속에 들어 있는 스마트 폰.
그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기까지의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외면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기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직전에 스마트 폰 액정이 순간적으로 초록색으로 변하며 통화 연결이 되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그에게 있어선 어떤 의미론 행운이었다.
아무런 특색이 없는 작은 방. 마치 묵고 가는 것만이 목적으로 만든 상업용 시설처럼 보인다. 한 사람이 앉을 정도의 작은 소파와 탁자. 간단한 샤워시설은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이용한 것처럼 아직 수증기가 자욱하고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다.
방구석에는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 위에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듯 때때로 침대보가 흔들리고 있는데, 그 아래에는 침대 위에 있는 사람이 벗어 둔 것으로 보이는 정장 옷가지가 흩어져 있다.
침대 아래 수많은 옷가지들 중 여성용 검은 정장 치마 주머니에 들어있는 스마트 폰은 시끄러운 벨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 위에서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왼손이 힘겹게 침대 아래로 향한다.
여성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때때로 경련하듯 움찔거리고 있었으며, 약지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어 결혼했다는 걸 알려준다. 여성의 왼손은 어떠한 힘을 받고 있기라도 한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크게 흔들리는 모습이 기묘하다.
힘겹게 정장 치마에서 스마트 폰을 꺼낸 여성의 손은 액정 위에 뜬 덜렁이라는 연락처 저장 이름에 크게 움찔거린다.
곧이어 여성의 손에선 어쩐지 다급함이 묻어나며 자신의 몸을 흔들리게 하는 무언가에 말을 건다. 시끄러운 벨소리에 다급한 여성의 목소리가 묻혀 잘 들리진 않았지만 벨소리 속에 숨어있던 찰진 타격음이 잠시 멈추는 건 알 수 있었다.
여성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르며 액정의 화면이 초록색으로 바뀌며 연결됐음을 알리는 순간 여성의 왼손은 큰 힘이라도 받은 듯 튕겨져 나갈 듯 흔들린다. 여성의 왼손을 벗어난 스마트 폰은 침대 아래 옷가지에 툭하고 떨어진다.
“……아!”
시끄러웠던 벨소리가 멈추자 격렬히 흔들리는 침대보와 찰진 타격음은 조금 전처럼 작은 방 안을 터트릴 듯이 울려 퍼진다. 이젠 다급함과 초조함까지 묻어나는 여성의 왼손은 재빠르게 침대 아래로 향하지만 무언가에 붙잡힌 것처럼 그녀의 왼손은 스마트 폰과의 거리를 조금 남겨두고 좁혀지질 않는다.
초록색이던 스마트 폰 액정이 금세 붉게 변하며 전화가 끊어진 걸 알리는 걸 확인한 것일까? 아니면 침대 위에서 그 아래로 향하는 그녀를 막는 무언가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그녀의 가느다란 왼손은 허공에서 쫙 펴져 부들부들 떨리더니 곧이어 축하고 늘어진다.
이제는 검게 변한 스마트 폰 액정. 그 위에 축 늘어진 여성의 왼손과 약지에 끼워진 은색의 반지는 은은한 방의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다. 마치 도움을 청하는 것 같은 그녀의 손을 스마트 폰과 떨어트리기라도 하듯 축 늘어진 그녀의 손은 무언가의 힘에 의해 잡아당겨진 것처럼 스르륵 침대 위로 사라진다.
스멀스멀 땅거미가 지는 시각. 영업팀 직장인들은 김우영 부장이 온 뒤로는 칼 퇴근이라는 꿀 맛 같은 행복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을 깨부수려는 것처럼 김우영 부장은 저번 주부터 퇴근시간 1시간 전에 슬금슬금 사무실로 돌아와 일을 처리한다.
당연한 직장인의 모습이 어색한 김우영 부장.
오늘도 어김없이 오렌지 빛 황혼이 세상을 뒤덮기 시작하자 사무실로 돌아와 자신의 자리에서 일을 보고 있다. 처음에는 영업팀 사원들도 상사의 눈치를 살폈지만 곧이어 그 눈치 보는 일도 얼마 가지 않고, 보란 듯이 퇴근 시간에 초침이 가는 순간 쏜살같이 사라진다.
퇴근 시간 후의 영업팀 풍경은 비슷하다.
일이 남아있어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해야 하는 몇몇 사원들과 김우영 부장과 어째서인지 항상 남는 안정수 사원. 이것이 이 회사의 영업팀 야근 풍경이다.
“…….”
안정수는 오늘도 어김없이 퇴근 시간에 돌아온 김우영 부장에게 곁눈질을 한다. 마치 자신에게 할 말 없냐는 둥 일부러 돌아와는 자신의 노고를 알아달라는 것처럼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자리에 앉아 싱글벙글 웃고만 있다.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 황혼 빛으로 물들었던 사무실도 어느새 적적한 어둠이 깔린다. 강렬한 형광등 불빛 때문에 시간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안정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딴 짓 하던 김우영 부장이 다가오는 자신을 보곤 의문과 흥미가 섞인 얼굴로 바라본다.
“음? 안 사원 할 말 있나?”
“……흠. 오늘 저녁 한 끼 어떠신가요?”
순간적으로 김우영 부장의 눈에 빛이 스쳐지나간 것처럼 보인 건 자신의 착각일까? 김우영 부장은 자신이 이런 제안을 하길 기다렸다는 듯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김우영의 뒷모습을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던 안정수는 외투를 챙겨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저녁 시간이 살짝 지난 음식점은 적당한 열기에 휩싸여있다. 술이 들어가 기분이 고조된 사람들의 웃음소리, 음식이 내뿜는 맛있는 향기와 열기는 하루의 피곤을 싹 날려주는 것 같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묘하게 붕 뜬 하나의 테이블이 있다.
“…….”
“흐음~술이 맛있네.”
안정수와 김우영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곳. 흔하디흔한 광경이지만 어쩐지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 때문인지 다른 테이블들과는 주위에 보이지 않는 벽이 쳐져 있는 느낌이다.
또한 그 둘의 태도도 묘하기 그지없다. 경계심이 서린 안정수와 그의 태도를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은 김우영의 모습이지만 묘하게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옆에서 다른 사람이 본다면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도 경직되어 있다.
두런두런 이야기가 오간다 싶으면 어느새 정적이 흐르고, 기울여져 가는 술잔과 지글지글 익고 있는 고기만을 의무적으로 입으로 가져가 우물우물 씹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정신없는 음식점 풍경 속에서도 시선을 모은다.
“……그나저나 안 사원이 먼저 저녁을 먹자고 하자니 무슨 일일까?”
술이 잔뜩 들어간 두 남자. 그 숨 막히는 저녁 자리에서 가장 먼저 패를 꺼내든 건 김우영이었다.
명백히 위에서 보는 시선과 태도.
운을 떼 줬으니 자기가 가진 패를 꺼내보라는 상급자의 시선에 안정수의 얼굴에 살짝 인상이 써졌지만 곧이어 짐짓 모른 척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흐음……아무래도 일이 힘들어서인지 스트레스가 상당히 쌓인 것 같습니다. 아내와의 사이도 그렇고…….”
짐짓 일상에 치이고, 가정에 치이는 것처럼 이야기를 조금씩 전개해 나간다. 빙 돌려 말하는 그의 말과 모습에선 마치 꺼내기 어려운 말을 꺼내며 부탁하는 입장을 연기한다.
‘순진하고 덜렁거리는 모습만을 보여줘야 하는데……늦었나?’
아직 품 속에 숨긴 이빨을 들이밀 때가 아닌데도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뜨거운 본심 때문에 표정 관리가 잘 안 된다. 김우영 부장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마치 더 해보라는 듯 그 역시 모른 채하며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허허~요새 일이 그렇지 뭐…….”
주거니 받거니.
의미 없는 대화가 오간다. 단 한 가지 주제로 넘어가는 것이 어찌나 힘든지, 김우영 부장의 시치미 어린 모습도 한 몫 하지만 자꾸만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본심 때문에 먼저 그 날의 약속을 언급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 수 없다. 테이블 아래로 꼭 쥔 주먹은 펴질 줄 모르며 쓰디쓴 술만 물처럼 들이부으며 결심을 굳힌다.
‘후우……한심한 놈아 언제까지 고민만 할 거냐.’
한 번 실패했다는 것 때문일까? 차갑게 식은 가슴에 억지로 불을 지피며 굳은 가슴을 억지로 두들겨 패 말을 꺼낸다.
“그래서 말인데……지난번에 있었던 하룻밤의 불장난을 또 할 수 있을까요?”
안정수는 사늘하게 식으려는 가슴을 억지로 두들겨 움직이게 하며 태도는 최대한 약자를 얼굴은 너무나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연기다.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소중한 자신을 향한, 가슴 속 작은 배덕감을 향한 연기를 쥐어짜낸다.
그리고 김우영 부장은 자신의 연기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다는 듯,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모습은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춘다. 술잔을 기울이던 그는 조용히 빈 술잔을 내려놓곤 자신에게 시선을 던진다.
“…….”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두 남자는 서로의 마음을 읽으려는 듯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을 훔쳐본다. 두 남자는 얼마나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최초의 변화는 김우영 쪽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
안정수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나 봐오던 김우영이란 남자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가면이 떠올라 있었다. 껄렁껄렁하던 태도도, 능글맞으면서 비릿한 미소도, 여직원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혐오어린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기는 사람 좋은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김우영 부장의 입은 길고 긴 초승달 같은 호를 그렸다.
조용한 미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진정한 미소를 엿본 것 같다. 사람의 웃는 얼굴이란 건 이렇게 소름끼치는 것이었던가? 음식점의 시끌벅적하고 뜨거운 열기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정적어린 그 작은 미소를 보자 안정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으려는 걸 겨우 참아냈다.
“……좋지. 응. 그럼 시간과 장소는 그때처럼 따로 알려주도록 하겠네. 언제가 좋을까……그래 가능하면 이번 주 금요일이 좋겠군……다음날이 주말이니 좋지 않겠는가?”
“……그러도록 하죠.”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나기로 할까?”
그 말을 끝으로 김우영 부장은 냉큼 일어서서 저녁 값을 계산하곤 먼저 자리를 떠버렸다. 안정수는 다시금 타들어가는 속을 달래려는 듯 남아 있는 술을 자신의 술잔에 털어 넣곤 단번에 들이키곤 자리에서 일어선다.
“…….”
술 취한 사람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밤의 거리. 음식점에서 나온 안정수는 기분 좋게 취해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 행복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가는 김우영 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방금 전 보았던 그의 미소를 몇 번이고 되새겨 본다.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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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습니다. 죄송합니다 ㅜㅡ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 마당에 죽을 것 같이 바빠 도저히 글을 쓸 시간이 안 나네요...
피곤에 찌들어 비몽사몽하며 써서 한 번 읽어보지도 못하고 올립니다.
이상한 부분은...추후 수정할 수 있겠죠...?
돌만 던지지 말아주세요 ㅜㅡ
쪽지도 점점 쌓여가는데...답장할 시간도 없고...어흑 쪽지 주시는 분들 죄송합니다 ㅜㅡ
“……하늘은 참 평화롭네.”
건물 사이로 보이는 작은 하늘에 위안을 얻기 위해 올려다보며 그 하늘에 닿길 바라는 듯이 뿌연 담배연기를 훅 내뿜어보는 이가 있다. 이 수많은 건물들에는 수많은 직장인들이 각자의 일에 종사하며 드문드문 일에 지친 직장인들이 잠시 야외 휴게실로 나와 담배를 뻐금뻐금 피우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풍경 속의 직장인.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전쟁터에서 잠시 피신 나온 그의 이름은 안정수다.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지치는 요일이 찾아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말에 푹 쉬지 못했던 것일까? 안정수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짙게 깔려있다.
“후우~정말이지. 일도 손에 안 잡히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담배를 의무적으로 태우고 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자꾸만 주말에 있었던 일에 정신이 팔리기 때문이다. 안정수는 주말을 계속해서 돌이켜 보며 결국 잠들어 버린 자신을 탓한다.
‘그것도 문제지만…….’
안정수는 그날 밤 잠들어버린 자신보다는 다음 날 아내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려 한심한 자신을 탓하는 일보단 아내가 신경 쓰여서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묘하단 말이야…….”
그날 밤 아내와 김우영 부장이 몸을 섞은 건 확실하다. 그것도 상당히 진하게…….
그 때문인지 아침에 본 아내의 모습은 상당히 피곤함이 배어나왔다. 어색한 자신의 태도와 가랑이 사이에 하얗게 말라붙은 진한 정사의 흔적을 스스로 눈치 못 챌 정도로 피곤해 보이는 아내였다. 그럼에도 자신과 어디론가 놀러가고 싶어 했고, 결국에는 당일치기로 외출을 강행했다.
여기서 떠오르는 의문.
왜 아내는 굳이 자신과 외출을 하고 싶어 했을까? 물론 서먹하고 어색해진 부부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라고 덜렁이인 자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그 사실을 어필하며 힘껏 즐겼다.
‘…….’
굳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다음 날 부부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피곤함을 무릅쓰고 외출했다는 점이 안정수의 신경을 계속해서 건드렸다.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정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아내가 자신과 외출해서 거짓으로 즐거워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분명 굉장히 즐거워했지.’
오랜만에 보는 정말로 즐거운 아내의 미소.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며 점점 높아지는 자존심 때문인지, 그렇게 순수하게 즐기는 아내의 모습은 20대 이후 거의 보지 못했는데 마치 자신과 연애할 때의 그때처럼 그녀는 순수하게 즐거워했다.
“……후우우우.”
담배 연기를 토해낸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긴 숨을 토해내며 안정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답답한 의문을 토해낸다. 살을 부비고 살아도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알 도리가 없으니 안정수로써는 그녀의 이중된 모습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김우영의 품에 안겨 쾌락에 헐떡이는 아내의 미소와 자신의 품에 안겨 즐겁고 순수한 아내의 미소.
두 미소의 의미를 모르겠다.
그 미소의 의미를 아는 건 간단하다. 그냥 아내를 붙잡고 왜 그랬냐는 말 한마디.
딱 한 마디면 된다.
하지만 그 한 마디를 건넬 용기가 나질 않기에 몰래 지켜보기로 했거늘…….
“두 번째는 힘들겠지.”
김우영 부장의 대담함을 생각 못 한 게 안정수의 패착이다. 아무리 대담한 그여도 또 다시 집으로 초대하는 건 너무나 수상쩍어 할 것이다. 게다가 설마하니 남편이 있는 집에서 정말로 남의 아내를 탐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도 안 된다고 결론내고 마음 한 편으론 아내를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나 안도감을 느끼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감의 끈을 잠시 놓았더니 물밀 듯이 몰려오는 피로감에 컨디션을 조절 못 한 게 또 다른 가장 큰 패착이기도 하다.
“……쯧.”
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남자 아래 깔려 헐떡이는 모습을 기습적으로 들이밀어진 상태에서 본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쉬울 리 없다. 하지만 한 번 실패했기 때문일까? 마음 속 부글부글 끓던 질투심과 같은 뜨거운 감정은 많이 가라앉고 두 번의 실패를 막기 위해 한층 차분히 가라앉은 자신을 느끼고 있다.
“…….”
두 번의 실패를 없애기 위해 냉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주말에 아내와 외출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강하게 머릿속 한 편에 자리 잡고 있다.
“이제는 그 방법을 써야하나?”
안정수는 이 방법만은 쓰기 싫었는데, 어떤 의미론 이 방법이 아내의 의도를 알아보는 것엔 틀림없다. 오히려 집에서 확인하는 방법보다 더욱 적합하다.
바로 김우영 부장과의 불장난.
자신이 아내에게 한 가장 큰 잘못인 하룻밤의 불장난.
분명 김우영 부장은 자신에게 그런 자리를 꼭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한 번으로 족할 그런 자리를 종종 이런 자리를 가지자고 구태여 말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그냥 상투적인 누구나가 하는 언제 한 번 저녁 먹자는 직장인들의 겉치레 같은 말. 물론 저녁 한 번 먹자는 말과는 괴를 달리하는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묘할 정도로 안정수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마치 이런 자리가 한 번 더 있을 것이란 걸 확신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이 약속 아닌 약속이 왜 가장 이 상황에 적합하냐고 하면……바로 그 하룻밤의 불장난의 대상이 아내가 될 수도 있다.
상대도 모르고, 그녀를 안는 자신도 상대방의 정체를 모르는 말도 안 되는 하룻밤의 불장난.
“하지만 그걸 가능케 한단 말이지…….”
지금 돌이켜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여자와는 미리 말을 맞춰놨을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여자도 상대방이 바뀌는 걸 모를 수 있는 상황.
그렇기에 안정수는 이 생각을 머릿속 한 편에 밀어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날 밤 아내의 의도를 확인하지 못했기에 이젠 아내 몰래 그녀의 의도를 확인하기엔 이것 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아니, 이 방법이 좋다고 그의 가슴 속 작지만 깊게 뿌리내린 배덕감이 자신에게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처럼 자신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만약 그런 자리에 아내가 나온다면? 그 자리에 나오기 위해 아내는 김우영 부장과 미리 말을 맞췄을까? 아니면 자신이 믿고 싶은 것처럼 사랑하는 아내는 그 자리에 억지로 불려나온 것일까?
“꿀꺽…….”
안정수는 손에 쥔 담배가 서서히 타들어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머릿속에 떠오른 아내의 모습에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걸 느끼며 마른침을 삼켜보지만 갈증은 더해져만 간다.
“동시에 아내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겠지.”
아내가 그런 자리에 안 나온다는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얼마 전 자신이 마련한 무대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올라가는 김우영의 모습에서 확신을 했다. 그라면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자기 물건을 과시하듯이 자신이 제안한 무대에 아내를 끌고 나올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확인하고 싶은 아내의 의도는 그때 확실히 밝혀질 것이다.
미리 말을 맞추고 나왔을 것이냐, 모르고 나왔을 것이냐…….
자신은 아내의 반응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모르겠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두근거림과 긴장으로 인해 몸이 뻣뻣하게 굳는 걸 보면 아직도 자신은 망설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다시 한 번 그 자리에 자신이 선다면 억눌렀던, 외면했던 감정이 봇물 터지듯 넘쳐흐를 건 확실하다.
“하지만 김우영 부장은…….”
다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그를 떠올린다. 야외 휴게실로 나오며 스쳐지나가듯 보았던 그의 텅 빈 부장 자리.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자리를 비웠다.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그의 행동이지만 텅 빈 그 자리를 볼 때마다 아내를 만나러 간 건 아닐까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다.
“후우…….”
안정수는 작은 한숨을 쉬며 품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적인다. 수많은 연락처 중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메롱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
아내의 전화번호다.
눈매 사나운 마귀할멈이라고 저장해둔 걸 아내에게 들켜 등짝을 시원하게 얻어맞은 뒤 그녀가 바꿔준 이름이다. 서로 사람 만나는 일을 하기에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연락하는 걸 자제하는 게 암묵적인 룰이 되어버렸다. 지금에 이르러선 이 암묵적인 룰 때문에 연락하는 것에도 작은 용기가 필요할 정도다. 메롱이라 적혀있는 연락처에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걸까?
“…….”
겨우 전화 한 통. 이런 것에 망설이고 있는 걸 보면 자신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서로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에 너무 기대고 있었던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안정수는 자꾸만 마르는 입 때문에 갈증을 해소하듯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절전 기능 때문에 자꾸만 꺼지는 스마트 폰 액정을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액정 위에 굳은 것처럼 영원히 움직이지 않던 손가락이 파란 전화 표시를 꾹 누른다.
“…….”
경쾌한 효과음과 동시에 통화가 연결되는 연결음이 스마트 폰에서 흘러나온다. 짧은 연결음이 한 번 울릴 때마다 안정수의 가슴의 고통은 더욱 커지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 자신의 손가락을 말리느라 고역이다. 연결되지 않는 스마트 폰 액정을 외면하듯이 그는 푸른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려버린다.
안정수의 손아귀에 쥔 스마트 폰에서 흘러나오는 통화 연결음이 고통이라도 주는 것처럼 그의 손은 움찔거리며 통화 종료 버튼 위에서 까딱거린다.
10초가 이렇게 길었던가? 지금 통화를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난거지?
안정수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도 귓가에 울리는 통화 연결음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흘러가는 시간에 압사 당할 것처럼 긴장이 고조된다.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은 이 긴장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듯 스마트 폰 액정 위에서 다른 생물처럼 움찔거린다.
“…….”
통화를 시작한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이제 곧 부재중일 때 흘러나오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건 아닐까? 역시 일이 바쁜 걸까? 주말이 아니어도 근래 굉장히 일이 피곤해 보이긴 했는데…….
온갖 추측과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귓가에 울리는 통화 연결음을 더 이상 참기 힘든 것처럼 경련하듯 움찔거리던 그의 손가락은 계속되는 통화 연결음이 끝나는 순간에 맞춰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눌러버린다.
“하아…….”
자신의 의지였을까? 아니면 자신을 옥죄는 통화 연결음을 견디기 힘든 손가락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기 멋대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것일까?
안정수는 혼란스런 머리와 아직도 진정이 안 되는 가슴을 부여잡고 올려다보고 있던 푸른 하늘을 향해 길고 긴 한숨을 다시 한 번 토해내곤 일터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그의 주미니 속에 들어 있는 스마트 폰.
그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기까지의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외면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기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직전에 스마트 폰 액정이 순간적으로 초록색으로 변하며 통화 연결이 되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그에게 있어선 어떤 의미론 행운이었다.
아무런 특색이 없는 작은 방. 마치 묵고 가는 것만이 목적으로 만든 상업용 시설처럼 보인다. 한 사람이 앉을 정도의 작은 소파와 탁자. 간단한 샤워시설은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이용한 것처럼 아직 수증기가 자욱하고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다.
방구석에는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 위에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듯 때때로 침대보가 흔들리고 있는데, 그 아래에는 침대 위에 있는 사람이 벗어 둔 것으로 보이는 정장 옷가지가 흩어져 있다.
침대 아래 수많은 옷가지들 중 여성용 검은 정장 치마 주머니에 들어있는 스마트 폰은 시끄러운 벨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 위에서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왼손이 힘겹게 침대 아래로 향한다.
여성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때때로 경련하듯 움찔거리고 있었으며, 약지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어 결혼했다는 걸 알려준다. 여성의 왼손은 어떠한 힘을 받고 있기라도 한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크게 흔들리는 모습이 기묘하다.
힘겹게 정장 치마에서 스마트 폰을 꺼낸 여성의 손은 액정 위에 뜬 덜렁이라는 연락처 저장 이름에 크게 움찔거린다.
곧이어 여성의 손에선 어쩐지 다급함이 묻어나며 자신의 몸을 흔들리게 하는 무언가에 말을 건다. 시끄러운 벨소리에 다급한 여성의 목소리가 묻혀 잘 들리진 않았지만 벨소리 속에 숨어있던 찰진 타격음이 잠시 멈추는 건 알 수 있었다.
여성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르며 액정의 화면이 초록색으로 바뀌며 연결됐음을 알리는 순간 여성의 왼손은 큰 힘이라도 받은 듯 튕겨져 나갈 듯 흔들린다. 여성의 왼손을 벗어난 스마트 폰은 침대 아래 옷가지에 툭하고 떨어진다.
“……아!”
시끄러웠던 벨소리가 멈추자 격렬히 흔들리는 침대보와 찰진 타격음은 조금 전처럼 작은 방 안을 터트릴 듯이 울려 퍼진다. 이젠 다급함과 초조함까지 묻어나는 여성의 왼손은 재빠르게 침대 아래로 향하지만 무언가에 붙잡힌 것처럼 그녀의 왼손은 스마트 폰과의 거리를 조금 남겨두고 좁혀지질 않는다.
초록색이던 스마트 폰 액정이 금세 붉게 변하며 전화가 끊어진 걸 알리는 걸 확인한 것일까? 아니면 침대 위에서 그 아래로 향하는 그녀를 막는 무언가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그녀의 가느다란 왼손은 허공에서 쫙 펴져 부들부들 떨리더니 곧이어 축하고 늘어진다.
이제는 검게 변한 스마트 폰 액정. 그 위에 축 늘어진 여성의 왼손과 약지에 끼워진 은색의 반지는 은은한 방의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다. 마치 도움을 청하는 것 같은 그녀의 손을 스마트 폰과 떨어트리기라도 하듯 축 늘어진 그녀의 손은 무언가의 힘에 의해 잡아당겨진 것처럼 스르륵 침대 위로 사라진다.
스멀스멀 땅거미가 지는 시각. 영업팀 직장인들은 김우영 부장이 온 뒤로는 칼 퇴근이라는 꿀 맛 같은 행복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을 깨부수려는 것처럼 김우영 부장은 저번 주부터 퇴근시간 1시간 전에 슬금슬금 사무실로 돌아와 일을 처리한다.
당연한 직장인의 모습이 어색한 김우영 부장.
오늘도 어김없이 오렌지 빛 황혼이 세상을 뒤덮기 시작하자 사무실로 돌아와 자신의 자리에서 일을 보고 있다. 처음에는 영업팀 사원들도 상사의 눈치를 살폈지만 곧이어 그 눈치 보는 일도 얼마 가지 않고, 보란 듯이 퇴근 시간에 초침이 가는 순간 쏜살같이 사라진다.
퇴근 시간 후의 영업팀 풍경은 비슷하다.
일이 남아있어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해야 하는 몇몇 사원들과 김우영 부장과 어째서인지 항상 남는 안정수 사원. 이것이 이 회사의 영업팀 야근 풍경이다.
“…….”
안정수는 오늘도 어김없이 퇴근 시간에 돌아온 김우영 부장에게 곁눈질을 한다. 마치 자신에게 할 말 없냐는 둥 일부러 돌아와는 자신의 노고를 알아달라는 것처럼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자리에 앉아 싱글벙글 웃고만 있다.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 황혼 빛으로 물들었던 사무실도 어느새 적적한 어둠이 깔린다. 강렬한 형광등 불빛 때문에 시간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안정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딴 짓 하던 김우영 부장이 다가오는 자신을 보곤 의문과 흥미가 섞인 얼굴로 바라본다.
“음? 안 사원 할 말 있나?”
“……흠. 오늘 저녁 한 끼 어떠신가요?”
순간적으로 김우영 부장의 눈에 빛이 스쳐지나간 것처럼 보인 건 자신의 착각일까? 김우영 부장은 자신이 이런 제안을 하길 기다렸다는 듯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김우영의 뒷모습을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던 안정수는 외투를 챙겨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저녁 시간이 살짝 지난 음식점은 적당한 열기에 휩싸여있다. 술이 들어가 기분이 고조된 사람들의 웃음소리, 음식이 내뿜는 맛있는 향기와 열기는 하루의 피곤을 싹 날려주는 것 같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묘하게 붕 뜬 하나의 테이블이 있다.
“…….”
“흐음~술이 맛있네.”
안정수와 김우영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곳. 흔하디흔한 광경이지만 어쩐지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 때문인지 다른 테이블들과는 주위에 보이지 않는 벽이 쳐져 있는 느낌이다.
또한 그 둘의 태도도 묘하기 그지없다. 경계심이 서린 안정수와 그의 태도를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은 김우영의 모습이지만 묘하게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옆에서 다른 사람이 본다면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도 경직되어 있다.
두런두런 이야기가 오간다 싶으면 어느새 정적이 흐르고, 기울여져 가는 술잔과 지글지글 익고 있는 고기만을 의무적으로 입으로 가져가 우물우물 씹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정신없는 음식점 풍경 속에서도 시선을 모은다.
“……그나저나 안 사원이 먼저 저녁을 먹자고 하자니 무슨 일일까?”
술이 잔뜩 들어간 두 남자. 그 숨 막히는 저녁 자리에서 가장 먼저 패를 꺼내든 건 김우영이었다.
명백히 위에서 보는 시선과 태도.
운을 떼 줬으니 자기가 가진 패를 꺼내보라는 상급자의 시선에 안정수의 얼굴에 살짝 인상이 써졌지만 곧이어 짐짓 모른 척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흐음……아무래도 일이 힘들어서인지 스트레스가 상당히 쌓인 것 같습니다. 아내와의 사이도 그렇고…….”
짐짓 일상에 치이고, 가정에 치이는 것처럼 이야기를 조금씩 전개해 나간다. 빙 돌려 말하는 그의 말과 모습에선 마치 꺼내기 어려운 말을 꺼내며 부탁하는 입장을 연기한다.
‘순진하고 덜렁거리는 모습만을 보여줘야 하는데……늦었나?’
아직 품 속에 숨긴 이빨을 들이밀 때가 아닌데도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뜨거운 본심 때문에 표정 관리가 잘 안 된다. 김우영 부장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마치 더 해보라는 듯 그 역시 모른 채하며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허허~요새 일이 그렇지 뭐…….”
주거니 받거니.
의미 없는 대화가 오간다. 단 한 가지 주제로 넘어가는 것이 어찌나 힘든지, 김우영 부장의 시치미 어린 모습도 한 몫 하지만 자꾸만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본심 때문에 먼저 그 날의 약속을 언급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 수 없다. 테이블 아래로 꼭 쥔 주먹은 펴질 줄 모르며 쓰디쓴 술만 물처럼 들이부으며 결심을 굳힌다.
‘후우……한심한 놈아 언제까지 고민만 할 거냐.’
한 번 실패했다는 것 때문일까? 차갑게 식은 가슴에 억지로 불을 지피며 굳은 가슴을 억지로 두들겨 패 말을 꺼낸다.
“그래서 말인데……지난번에 있었던 하룻밤의 불장난을 또 할 수 있을까요?”
안정수는 사늘하게 식으려는 가슴을 억지로 두들겨 움직이게 하며 태도는 최대한 약자를 얼굴은 너무나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연기다.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소중한 자신을 향한, 가슴 속 작은 배덕감을 향한 연기를 쥐어짜낸다.
그리고 김우영 부장은 자신의 연기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다는 듯,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모습은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춘다. 술잔을 기울이던 그는 조용히 빈 술잔을 내려놓곤 자신에게 시선을 던진다.
“…….”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두 남자는 서로의 마음을 읽으려는 듯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을 훔쳐본다. 두 남자는 얼마나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최초의 변화는 김우영 쪽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
안정수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나 봐오던 김우영이란 남자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가면이 떠올라 있었다. 껄렁껄렁하던 태도도, 능글맞으면서 비릿한 미소도, 여직원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혐오어린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기는 사람 좋은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김우영 부장의 입은 길고 긴 초승달 같은 호를 그렸다.
조용한 미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진정한 미소를 엿본 것 같다. 사람의 웃는 얼굴이란 건 이렇게 소름끼치는 것이었던가? 음식점의 시끌벅적하고 뜨거운 열기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정적어린 그 작은 미소를 보자 안정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으려는 걸 겨우 참아냈다.
“……좋지. 응. 그럼 시간과 장소는 그때처럼 따로 알려주도록 하겠네. 언제가 좋을까……그래 가능하면 이번 주 금요일이 좋겠군……다음날이 주말이니 좋지 않겠는가?”
“……그러도록 하죠.”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나기로 할까?”
그 말을 끝으로 김우영 부장은 냉큼 일어서서 저녁 값을 계산하곤 먼저 자리를 떠버렸다. 안정수는 다시금 타들어가는 속을 달래려는 듯 남아 있는 술을 자신의 술잔에 털어 넣곤 단번에 들이키곤 자리에서 일어선다.
“…….”
술 취한 사람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밤의 거리. 음식점에서 나온 안정수는 기분 좋게 취해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 행복한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가는 김우영 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방금 전 보았던 그의 미소를 몇 번이고 되새겨 본다.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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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습니다. 죄송합니다 ㅜㅡ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 마당에 죽을 것 같이 바빠 도저히 글을 쓸 시간이 안 나네요...
피곤에 찌들어 비몽사몽하며 써서 한 번 읽어보지도 못하고 올립니다.
이상한 부분은...추후 수정할 수 있겠죠...?
돌만 던지지 말아주세요 ㅜㅡ
쪽지도 점점 쌓여가는데...답장할 시간도 없고...어흑 쪽지 주시는 분들 죄송합니다 ㅜ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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