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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촌리 설화(金村里 說話) - 2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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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촍리 설화(金忖里 說話) - 26
영숙이 누나가 집에 돌아왔다. 제재소에서 일하는 누나를 불러 내 황달자와 제과점에서 만난지 이틀 후다.
"웬 일이고?"
점심 때가 다 되어 불쑥 들어서는 누나를 보고 엄마가 다급하게 물었다. 남의 집살이를 하다 집에 왔건만, 휴일도 아닌 날에 갑자기 나타난 딸이 우선 걱정스런 것이다.
"응, 하루 좀 슀다 갈라고 ...... "
"와? ...... 무슨 일이 있나?"
"아니, 그저 몸도 좀 피로하고 ...... "
"어디 아프나?""
"별거 아이다. 하루쯤 푹 잠을 자마 괘않을끼다."
"요전에 왔을 때는 괘않더니 와, 고뿔이나 몸살이라도 났나? ...... 열은 없는데 ...... ?"
엄마는 누나의 이마까지 짚어 보면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부산을 떤다.
"괘않다카이 ...... 하루쯤 쉬마 된다. 우선 밥이나 묵자. 배 고프다."
누나의 애매한 말에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밥상을 차리려 부엌으로 나갔다.
안방에는 영미 누나가 있었고, 건너방에 있었던 영자 누나와 나도 누나가 오는 기척에 모두 안방에 모였다.
"니, 무슨 일이 있나?"
영자 누나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별거 아이다. 그저 하루 좀 집에서 쉴라 카는데 와 모두 이래 수선을 피노?"
영숙이 누나의 말에 영자 누나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다섯명이 둘러 앉아 점심을 다 먹을 때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영숙이 누나는 나에게 말을 걸기는커녕 눈길도 한번 주지 않앗다.
사실 가족중에 영숙이 누나의 돌연한 등장에 가장 궁금한 것은 나였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누나가 제재소 사장 및 그 아들과 빠구리를 한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달자까지 끌어들여 해결책을 찾으려 했는데 누나는 이렇게 불쑥 나타나 애매한 말만 하면서 딴청을 피우고 있다.
궁금증을 넘어 나는 불안하고 겁이 나기까지 했다. 괜히 내가 누나의 일에 끼어들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나 때문에 누나가 그 집에서 쫓겨나고 결국 학업도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닐까, ......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지만 얼음장 같은 누나에게서 전혀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영숙이 누나는 계속 나에게 냉랭한 채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잠도 안방에서 엄마와 잤다.
이튿날, 나는 점자를 배우려 영자 누나를 박금순네 집에 데려다 주기로 약속한 날이다.
엄마와 영숙이 누나의 말을 들으니 누나도 아침을 먹고는 바로 웁내로 돌아간다고 했다.
"내도 오늘 큰 누부야캉 내리에 갈 일이 있는데 누부야하고 같이 갈까?"
한참을 망서리다 나는 영숙이 누나가 집에 온 뒤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집밖에서 함께 걷기라도 하면 무언가 누나의 속내를 알 수 있는 말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누나는 내 바램을 여전히 냉랭하게 잘라 버렸다.
"니는 걸어갈꺼 아이가? 내는 버스 타고 바로 읍내로 갈끼다."
영숙이 누나는 아침을 먹자 바로 읍내의 직장으로 돌아갔다. 영자 누나는 "숙제를 제대로 했나 한번 더 검사해 봐야겠다." 며 10장도 넘는 점자들을 다시 일일히 읽는 바람에 꽤 시간이 지체되었다.
누나는 아버지가 사 준 토끼털이 달린 겨울 코트를 입고 꽤 흐믓해 했다. 나도 역시 아버지의 선물인 새 점퍼를 입고 보니 우리는 오랫만에 별로 가난한 티가 나지 않는 남매처럼 생각되어 좀 우쭐했다.
박금순네 집을 향해 가면서 영자 누나는 자주 말을 걸어 왔지만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계속 영숙이 누나가 마음에 걸렸다.
우리가 빠구리 한 것에 대해 영숙이 누나는 크게 후회하고 있으며, 지난번 집을 떠날 때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 고 나한테 다짐했었다. 그 표정이나 언행으로 보아 누나는 크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또 들쭝나게 황달자에게 영숙이 누나의 창피한 사정을 그대로 털어 놓아 누나를 더욱 곤란하게 했다. 내가 달자와 같이 왔다는 것을 알고 경악했던 누나의 표정, 달자와 이야기 하면서 눈물을 훔치던 장면, 나와 헤어질 때 인사는 커녕 눈길도 주지 않아 누나가 나를 얼마나 미워하고 원망하는가를 알만 했다.
그런데 일해야 하는 날에 불쑥 집으로 돌아왔으니 그 이유가 궁금한데 속 시원한 설명이 없어 더욱 답답했다. 혹 나 때문에 누나가 제재소에서 쫓겨난 것은 아닌가. 그럼 학교도 못 다니게 될텐데 ...... 이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나 내리, 바로 박금순네 동네로 접어 들면서 영숙이 누나에 대한 근심보다는 금순을 만난다는 기대에 사로잡혔다.
박금순, --- 가까워 질수록 더욱 새롭고 신비함이 느껴지는 여인이다.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장님이면서도 세련되고 우아한 미인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빠구리를 했을 때 그녀는 숫처녀였고 하지만 보지는 동생 금지처럼 유난히 자지를 물어 주는 것이다. 체격이 큰 것처럼 젖통은 금지보다 훨씬 풍만한데 연분홍빛 젖꼭지는 금지처럼 평시에도 연필의 지우개처럼 봉긋 솟아 있다.
처음과 두번 째 빠구리를 할 때 그녀는 갓 목욕한 몸으로 나를 받아 주었다. 머릿결뿐 아니라 온 몸이 아직 물끼를 머금고 있는 듯 한데 그녀의 몸에서는 항상 향기가 난다.
때로는 찡그리고 수줍어 하면서 빠구리 자체에 겁을 내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몸속에는 또 넘칠듯한 욕구도 깃들어 있다. 하지만 나에게 처음 빠구리를 알게 해준 서울띠기나 다른 여인들처럼 그렇게 열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그런 점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나에게 "오르가즘을 느껴보고 싶다." 는 말까지 했다. 나도 오르가즘으로 환희에 가득 차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
"오늘도 선생님이 또 자고 가라 카마 우째야 되노?"
영자 누나가 말을 걸어 왔다.
"와? ...... 누부야는 그 집에서 자는기 불편하나?"
"아이다. 선생님하고 이야기 하는기 너무 좋다. 세상 일들도 많이 알게 되고 ...... 선생님은 책도 많이 읽으셨고 아는 것도 참 많더라. 하지만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 "
"금순이 누나도 누부야캉 같이 있는게 좋다 안카더나? 서로 좋으마 됐지, 뭐."
"하여튼 내가 동생 잘 둬가 참말로 꿈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누나가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나도 흐뭇함과 함께 누나에게 잘 해주는 금순이 새삼 고마웠다.
그럴수록 더욱 그녀와 빠구리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 오른다. 영자 누나의 말처럼 지금 내가 금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빠구리뿐이다. 나의 욕구 해소뿐 아니라 그녀가 정말 뽕 가도록 정성과 실력을 발휘해 봐야겠다고 새삼 마음을 다졌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일까. 나는 오늘도 허탕을 쳤다.
금순네 집에 금지는 없었으나 창호라는 그녀의 남동생도 함께 있었다. 창호는 22살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군에 입대해 마침 휴가를 나온 것이라는데 군복이 아니라 그저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금순은 영자 누나와 나에게 자기 남동생을 소개시켜 주었다.
분위기로 보아 도저히 이 집에서 금순이와 빠구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누나를 인계했으니 곧 그 집을 나오려 했다.
그러나 금순이 남매가 붙잡아 결국 네명이 소파에 둘러 앉아 차와 과자를 먹으며 잡담을 나누는데 덤덤히 끼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빌려준 책을 벌써 가져오게, 다 읽은 모양이지."
누나는 지난번 금순네 집에서 <헬렌 켈러전>과 <안델센 동화집>을 빌려 갔었다.
"예. 두가지 다 너무 좋았어예."
"어떤 점이 좋았는데 ...... ?"
"그기, 저 ...... "
금순의 질문에 누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헬렌 켈러 이야기는 그 전에 라디오로도 듣고 감명을 많이 받았심더. 그런데 내가 글자를 직접 읽어가면서 내용을 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더욱 감동이 컸어예. 특히 ...... "
누나는 또 머뭇거리며 얼굴을 붉히고 나서 말을 이었다.
"라디오로 들을 때는 듣도 보도 몬하는 헬렌 켈러가 일류 대학까지 들어간기 정말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책으로 차근차근 읽다보이 앤 설리반이라는 선생님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됐심더. 설리반 선생님이 없었으마 헬렌 켈러도 없었겠죠? 내한테는 선생님도 그리 느껴 집니더. 헬렌 켈러가 "내가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제일 먼저 설리반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내도 그리 된다마 선생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심더. 선생님은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죠?"
"아이, 영자가 또 사람 민망하게 하네."
그 두 여인은 모르겠지만 금순이도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미스 문이 잘못 생각했어요. 우리 누나는 볼품 없어. 미스 문이 훨씬 더 아름다워요."
창호가 옆에서 말 참견을 했다. 영숙이 누나를 제재소 반대머리 사장이 "미스 문"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도 금순이 남동생이 영자 누나를 "미스 문"이라고 했다. 그런 호칭이 내게는 좀 생소하게 들렸다. 금촌리에서는 누구도 누나들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얘는 ...... ? 영자가 예쁘다고 하면 되지, 왜 나를 끌어들여 창피를 주니?"
금순이가 동생을 살짝 꼬집으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가 앤 설리반이라면 미스 문이 바로 헬렌 켈러네. 당연히 주인공이 더 예뻐야지."
"아이, 그런기 아이라예."
누나도 얼굴을 붉혔지만 모두 미소를 띄운 채 분위기는 한껏 좋았다.
"<안델센 동화집> 도 너무 좋았심더. 그런 동화를 처음 읽어봐서 너무나 가슴이 저리고 감동적이라예."
분위기에 휩쓸린 것인지 이제 누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 미스 문은 동화라는 것을 처음 알았나요?"
창호가 누나에게 관심이 쏠렸는지 다시 끼어 들었다.
"아이라예. 라디오에서 <신데렐라> 나 <백설공주>, 또 <흥부 놀부> 나 <도깨비 감투> 같은 것들도 더러 들어 봤지예. ...... 그런데 안델센 동화들은 그 내용이 그 전에 알던 것과 많이 다르데요."
"어떤 점이 ...... ?"
창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다른 동화들은 거의 ...... "그래서 주인공은 잘 먹고 잘 살았다." 라는 식으로 끝나잖아예. 그래서 읽는 어린애들에게도 행복과 희망을 심어 주겠죠. 그런데 안델센의 <인어공주> 나 <성냥팔이 소녀> 같은 것은 한 없이 슬프고 불쌍한 이야기들이라예. 그래서 읽는 내도 슬프고 안스러운데 그기 읽고 나서는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보다 더 길고 진한 감동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니 내가 좀 이상한긴가예?"
"이상하긴 ...... 영자가 원래 감정이 풍부해서 그래. 또 슬픈 이야기나 비극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특징도 있는 것 같아. 내가 요즘도 가끔 되새기는 영화, ...... 물론 비극으로 끝나고, 내가 볼 수는 없어도 귀로 들으면서 분위기를 느낀거지만 <전원 교향곡>이라는 영화가 참 감동적이었어."
"<전원 교향곡> ...... ? ...... 그건 베토벤 심포니 6번 아입니꺼?"
누나가 물었다.
"맞아. 그런데 그 영화는 그 제목을 땄지만 내용은 앙드레 지드라는 소설가가 쓴 작품을 영화로 만든거야."
금순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맹아학교 점자교사일 때 보았던 영화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했다.
시골 마을의 목사가 오갈데 없는 맹인소녀 젤트류트를 맡아 보살피게 되면서 차츰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의 아들 역시 젤트류트를 사랑하게 된다. 예기치 못했던 이상한 삼각관계 속에서 그녀는 개안 수술을 해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때문에 그녀는 혼란에 빠진다. 그녀가 감사하고 존경하면서 환상으로 흠 왔던 목사는 늙어서 추하게 까지 보였으며 그렇다고 젊고 잘 생긴 그의 아들과 새롭게 사랑을 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그녀 때문에 부자간에도 미묘한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광명 속에서 오히려 더 큰 혼란과 좌절을 느낀 그녀는 결국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는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미스 문은 음악도 많이 아는 모양이네요?"
금순의 이야기가 끝나자 창호가 또 누나에게 물었다.
"아이라예. 그저 라디오로 가끔 들으본 것 뿐이라예."
누나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대답했다.
"아니야. 영자는 천부적으로 음악에 대한 감각을 타고 난 것 같아. 같이 노래를 불러 보거나 다른 음악을 들어봐도 영자의 절대음감이나 음악에 대한 이해는 내가 놀랄 지경이야. 영자가 일찍부터 교육과 접할 수 있었다면 정말 여러가지로 타고 난 재주를 더 꽃 피울 수도 있었을텐데 ..... "
나는 지난날 영자누나가 마마에 걸리기 전 동네의 재롱둥이로 소문날만큼 귀여움을 받았었다는 할아버지의 회한 섞인 말이 다시 생각났다.
"나도 대학 1학년 때 본 <미완성 교향곡> 이 음악과 관련돼 있으면서 참 감명깊게 본 것 중 하나예요."
창호가 또 하나의 영화를 소개했다.
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인 슈베르트는 젊은 시절 가난한 음악가였다. 마침 귀족의 파티에서 연주를 할 기회가 왔는데 그는 연미복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전당포에서 하나를 빌려 입고 자작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데 갑자기 여인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의 연미복에 붙어 있는 전당표를 보고 집주인의 딸이 웃어제낀 것이다.
대부분 가난한 예술가들이 그렇듯 그도 자존심만은 팽배해 있어 악보를 찢으며 연주를 중단,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그런데 그 사건을 계기로 슈베르트는 귀족의 딸과 사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며 그를 떠나 버린다. 사랑과 상심을 동시에 겪게 된 그는 그 반작용처럼 더욱 창작에 몰두한다. 특히 그날 그녀의 집에서 연주했던 악상을 더듬어 심포니로 악보에 옮긴다. 그러나 그녀가 웃음을 터뜨린 대목에 오면 악상이 끊겨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친구의 편지로 결혼한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그 편지를 들고 갈대가 춤추는 들판에서 다시 그녀를 추억한다. 그 배경에는 그가 심혈을 기울인 심포니가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자신에게 선언한다.
"앞으로도 이 곡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다."
금순과 누나는 귀로 듣는 그 이야기만으로도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목이 <미완성 교향곡> 이라고 ...... ? ...... 정말 재미 있겠는데 ...... 우리 읍내에서도 상영했었나?"
금순이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나야 여기 안 있었으니 모르지. 하지만 누나가 관심 있다면 이곳은 누나가 알아보고 서울에서 재개봉할 때는 내가 누나를 모셔서 감상하도록 할께."
"그래? 정말 한번 보고 싶다. 부탁해."
창호의 말에 금순이가 곧 화답했다.
보고 싶은 영화 하나 때문에 서울 나들이를 한다는 그들의 처지가 나한테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 같았다.
또 그들의 나누는 말들 중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많았지만 어떻든 누나가 화제의 중심이 되며 모두 관심을 보여주는 것에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결국 나를 실망시킨 것은 오늘도 금순이와 빠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학과 음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 사이에 내가 끼어들 수 있는 것도 없는데다 그 틈새에서 내가 금순에게 따로 접근할 여지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누나는 이틀밤을 금순네에서 보내기로 해 나는 사흘 후에 데리러 오기로 했다.
그 집에서 점심까지 얻어 먹고 나왔지만 좋은 음식에 배가 그득한 것과 달리 마음은 허전했다.
나는 다시 율곡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허탕을 쳤지만 다시 김춘자, 강복순과 만나고 싶었다.
춘자네 집 푸른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인기척 때문에 방문을 열고 나온 것은 그녀의 남동생 명수였다. 나를 보자 대뜸 인상을 쓰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표현을 하는 것이라기보다 나를 보자 기분이 나빠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나를 힐끗 보고는 다시 안방문을 열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부야, 니 꼬맹이 친구 왔다."
그래도 좀 기분이 풀어지는 것은 춘자가 나를 반갑게 맞아준 것이다.
"영도 왔나!"
그녀는 나를 보자 방문 앞에서부터 활짝 웃으며 대청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 다음의 행동은 나를 집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우리, 저쨔로 가자."
춘자는 내 손을 잡아 이끌며 대문을 나섰다.
"오늘은 동네 아지매들까지 몰려 와 고스톱을 치고, 국시 말아 묵고, 우리집이 완전히 운동회 하는 날이다. 어디, 복순네 집으로 가보자."
강복순네 집은 그녀의 집에서 고작 백미터 쯤 떨어진 거리였다. 김춘자와 강복순이 왜 항상 같이 다니는가를 알 것 같았다.다만 복순의 집은 스레트 지붕을 했지만 싸릿문이 달린, 지난 날은 초가 삼간이라고 할만큼 적은 집이었다.
"아부지, 저 왔심더."
"아, 춘자가!"
좁은 마당에서 장작을 패는 남자를 보고 춘자가 인사를 하자 곧 그 남자도 알은 체를 했다. 한겨울인데도 팔뚝을 걷고 얼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빙긋 웃음이 나왔다. 구렛나루나 걷어 올린 팔뚝이 온통 털 두성이였다.
서 있어도 겨드랑 털이 삐져 나오고 똥꾸멍까지 이어져 온통 시커멓게 털이 몰려 있는 강복순이 바로 제 아버지를 닮아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나영이가! ...... 니 언제 왔노? ...... 오랫만이네."
건너방의 문을 열며 춘자가 말했다. 복순의 방일텐데 또 다른 누가 있는 모양이다.
"응, 방학 후에도 할 일이 있어서 서울에 머물다가 ...... 집에 온거는 사흘 전이야."
오가는 말로 보아 친구사이 같은데 서울 말투였다.
"아, 춘자 왔나!"
이어서 이 방의 주인인 복순의 소리도 들렸다.
"그래, 영도도 같이 왔다."
"엄마야! 영도가 우리 집에 ...... "
그제서야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며 복순이 얼굴을 내밀고 나에게 웃어 보였다.
"어서 올라 온나."
춘자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자 아까 춘자가 나영이라고 불렀던 여학생을 볼 수 있었다. 우선 피부가 하얗고 단발머리에 안경을 끼고 있는데다 서울말씨를 쓰는 터라 웁내의 여고생인 춘자나 복순이와는 다른 이색적인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색적인 객을 보며 나는 낙담부터 했다. 금순네 집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오늘의 빠구리 기대는 날이 샌 것이다.
"요 앙큼한 가시나 ...... !"
방에 들어선 춘자가 복순에게 쏘아 부쳤다. 억양으로 보아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복순이 좀 당황하는 표정으로 얼굴마저 붉히는 것을 보니 뭔가 꿀리는 것도 있는 모양이다.
"아, ...... 나영이한테 내가 신세 좀 졌다. 우리 학교 수학 선생이 실력이 없는 긴지 의사소통이 안되는 긴지 늘 미적분이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드이 나영이한테 쪼매 배웠는데도 벌써 물리가 터진 것 같은기라."
"오야, 이 얌체 가시나야. 미적분은 내도 깜깜인데 그래, 니 혼자 도둑 공부해가 잘 묵고 잘 살아라."
방안에는 밥상에 교과서와 노트, 문제집 같은 것이 널려 있었다. 상황을 보니 복순이가 나영이에게 수학을 배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둘이 "7공주파" 이기 때문인지 하는 말들이 요상하기까지 하다. 지난번 황달자네 집에서 떼씹을 할 때도 문경미가 빠구리 경험이 없다고 털어 놓자 "배신자" 라며 닥달을 하더니, 여고생이 공부를 한다고 앙큼하다거나 얌체라고 들이대는 것이다.
"참, 귀한 손님들 왔는데 뭐라도 좀 챙기올께."
복순이 방을 나가자 춘자와 나영이 몇마디 서로 안부 인사 같은 것을 나누었다. 오가는 말로 보아 둘은 친구 사인데 나영은 서울말씨에 도시물을 먹은 티가 나서 시골처녀인 춘자와 대조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잠시 후 나영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군것질거리를 갖고 방으로 들어 오려는 복순이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갸가 갸가?"
"맞다."
둘은 나지막히 말해 방 안쪽에 있는 춘자에게는 안 들렸겠지만 문쪽에 앉은 나는 그 말을 얻어 들을 수 있었다. 아마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은데 빙긋 웃음이 나왔다. 서울말을 쓰는 그녀에게서 처음 사투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뒷날 전라도 사투리를 좀 알게 되었을 때 "거시기" 라는 말의 함축된 의미와 다양한 구사에 놀라며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있다.
"갸가 갸가?" 라는 말도 경상도 사투리의 묘미중 하나다. 굳이 설명하자면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냐?" 라는 정도의 뜻이겠지만 단 네글자로 표현할 수 있고 아마 그 때문에 나영도 서울말 대신 사투리를 썼을 것이다.
복순이가 식혜와 강정 몇개를 가져와 하나씩 집어들고 먹는 중 복순이 나와 나영을 서로 소개시켜 주었다.
"야는 영도라고 바로 문경미 동생이다. 쟈는 우리 중학교 동창인데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닌다."
"아, 그러세요? 저는 최나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저 눈인사만 하려던 나는 깜짝 놀랐다. 춘자도 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처음에는 그녀가 나를 놀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에게 장난끼는 전혀 없었다. 춘자나 복순과 동창이라면 경미와도 마찬가지인데 경미 동생이라는 나에게 너무 진지하고 공손하게 하는 말에 오히려 나는 당황해서 얼굴만 붉히며 아무 대꾸를 못했다.
식혜와 강정을 먹는 동안 세 여고생은 계속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나영의 서울 생활과 이곳에 남은 친구들의 이야기들로 나는 흥미도 없을 뿐더러 끼어들 여지도 없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따분하고 어색했다. 그래서 집에 갈 생각으로 엉덩이를 들썩이는데 나영이가 말했다.
"자, 모처럼 이렇게 모였는데 이제 모두 우리 집으로 갈까?"
"뭐라꼬 ...... ?"
춘자가 놀란 표정으로 묻는데 엉거주춤 서 있던 나도 놀럈다. 나영의 말투로 보면 나도 그녀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셈인데 그런 제안 자체가 엉뚱하게 들리는 것이다. 춘자나 복순이도 마찬가지 기분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도 응답을 않고 잠시 침묵이 흐르던 중 머리를 갸우뚱하던 춘자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복순아, 잠깐 내 좀 보자."
춘자가 복순이를 끌고 나가 나영이와 단 둘이 남게 되자 나영이는 외면한 채 입도 다물고 있다. 나는 더욱 자리가 불편했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오줌도 마려운 것 같았다. 마당으로 내려와 변소를 찾아 두리번대는데 부엌 뒤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 ...... 아주 동네 방네 나발을 불고 다니라, 가시나야! 그기 무슨 자랑꺼리라고 우리 클럽도 아닌 아한테 까발기노?"
좀 화가 난듯한 춘자의 목소리였다.
"내사 이래 맞닥뜨릴 줄 알았나?"
이어서 복순이의 좀 풀죽은 소리가 들렸다.
"중학교 3년동안 나영이하고는 내내 단짝이었다. 그래가 지나 내나 온갖 경험이나 마음속을 다 털어 놓는 사이라 양조장 일도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 것 뿐이다. 니가 영도를 우리 집에 안 데려왔으마 그저 얘깃거리로만 지나갔을 거 아이가?"
복순이는 나를 내세워 이제 춘자에게 반격을 가하는 모양이다.
두 여인의 말을 훔쳐 듣던 나도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았다.
복순이는 나와, ...... 어쩌면 "7공주파"의 다른 여고생들과 어울려 빠구리한 것을 나영에게 이야기 했다. "갸가 갸가?" 라면서 나를 확인하고 나서 진지하고 공손하게 나한테 인사한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춘자는 복순이를 닥달했다. 우리가 떼씹을 했을지언정 여고생인 그녀들이 남한테까지 떠들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자 복순이는 춘자가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 저 가시나도 영도하고 하겠다는기가?"
"내도 모른다. 즈그 집 같이 가자 카는 말도 갑자기 나온기라 ...... 어쨌든 쟈도 있는데 우리 집에서 판을 벌릴 수는 없는거 아이가?"
나는 그 자리에 더 머물지 못하고 오줌도 누지 못한 채 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뒤 방에 들어 온 춘자와 복순이가 어떻게 타협을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우리 네명은 모두 최나영의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를 앞장 서 인도하던 나영이 큰 대문 앞에서 멈추었을 때 나는 아, 최군수 집! 하고 기억을 되살렸다.
한 20간 쯤은 되어 보이는 이 큰 기와집은 어른들의 말을 줏어 듣고, 이 앞을 지날 때면 한번씩은 돌아보게 하던 집이었다.
이 집 주인은 최달호로 율곡리에서 출세한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는 우리 군의 군수를 지냈고, 다시 서울에서 꽤 높은 자리까지 공직생활을 하나 정년 퇴임했으며 4.19가 일어난 후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차점으로 낙선했다는 사연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후 최달호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집이 큰데다 모두 "최군수 집" 이라고 불러 나도 이곳을 지나치게 되면 그런 연상을 하게 되는 집이었다.
최군수가 또하나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는 것은 자식들이 모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한다는 점이다. 아들, 딸들이 모두 반에서나 전교에서나 1등을 할만큼 공부를 잘했고, 읍내에서 중학교만 마치고 모두 서울에서도 일류 고등학교와 일류 대학교를 다닌다는 것으로도 소문이 나 있었다. 나영은 그 최군수의 막내딸로 역시 서울에서 일류 여고를 다닌다는 것을 뒤에 알았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원은 잘 손질되어 있었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나영은 우리를 곧바로 별채 쪽으로 안내했다.
"내 방은 좀 추울거야. 오빠 방에는 난로도 있으니 그리 갈까?"
그녀의 오빠 방에 들어섰을 때 내 눈에 먼저 뜨이는 것은 난로보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해골이었다. 뒤쪽을 보았을 때는 무슨 도자기인줄 알았는데 춘자가 손을 대다 비명을 질러서 앞에서 봤더니 그림에서 봤던, 눈과 코 자리가 뻥 뚤리고 이빨 몇개가 빠진 채 모두 드러나 있는 해골 바가지였다.
더욱 기괴한 것은 벽에 걸려 있는 두폭의 그림이었다. 송윤초의 안방에서 본 족자처럼 길게 늘어진 그 곳에는 각각 사람의 전신상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다시 몸을 세로로 갈라 한쪽은 해골에 이어서 갈비뼈와 엉치뼈, 대퇴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뼈다귀만 그려져 있고, 다른 반쪽은 소고기 덩이처럼 붉은 몸에 온통 근육과 신경만 그려져 있었다. 또 한장은 몸속을 드러내 허파와 심장, 간과 밥통, 창자등 몸속의 장기들만 나와 있었다. 도자기나 그림이 집안을 장식하는 것이라면 이방 주인의 취미는 정말 기괴한 것 같다.
나영이 석유난로를 피우자 방안은 금방 훈기가 돌았다. 춘자와 복순이도 방을 둘러 보며 기괴한 풍경에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판단은 달랐다.
"아, 이 방이 의사 한다는 느그 오빠 방이가?"
중학교 때 단짝이라던 복순이도 이 방은 처음 와보는 모양이었다.
"의사는 무슨 ...... 아직 본과 3학년인데 ...... 의과대학을 졸업하고도 전문의라고 간판을 걸려면 또 인턴, 레지던트라는 코스를 밟아 모두 한 10년은 공부를 계속해야 해. 큰 오빠 공부하는 것 보니 너무 힘들어서 나는 절대로 의사 같은 것은 안하겠다고 작정했어."
그러고보니 방안의 기괴한 장식물들은 취미가 아니라 학습교재였던 셈이다.
해골이나 인체 해부도 같은 것 말고도 책장에는 영어나 한문으로 된 두꺼운 책들이 뻑뻑하게 쌓여 있었다.
"오빠는 어디 갔노?"
춘자가 묻는데 나도 해골바가지나 내장기관을 공부하는 이 방 주인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미국에 갔어. 방학중에 삼촌댁에 들렸다가 한 열흘쯤은 무전여행을 하겠다나 ...... "
아까 박금순이 보고 싶은 영화 때문에 서울나들이를 한다는 말이 부러웠는데 나영이 오빠는 방학이라고 미국여행까지 하고 있다. 모두 나와는 다를
영숙이 누나가 집에 돌아왔다. 제재소에서 일하는 누나를 불러 내 황달자와 제과점에서 만난지 이틀 후다.
"웬 일이고?"
점심 때가 다 되어 불쑥 들어서는 누나를 보고 엄마가 다급하게 물었다. 남의 집살이를 하다 집에 왔건만, 휴일도 아닌 날에 갑자기 나타난 딸이 우선 걱정스런 것이다.
"응, 하루 좀 슀다 갈라고 ...... "
"와? ...... 무슨 일이 있나?"
"아니, 그저 몸도 좀 피로하고 ...... "
"어디 아프나?""
"별거 아이다. 하루쯤 푹 잠을 자마 괘않을끼다."
"요전에 왔을 때는 괘않더니 와, 고뿔이나 몸살이라도 났나? ...... 열은 없는데 ...... ?"
엄마는 누나의 이마까지 짚어 보면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부산을 떤다.
"괘않다카이 ...... 하루쯤 쉬마 된다. 우선 밥이나 묵자. 배 고프다."
누나의 애매한 말에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밥상을 차리려 부엌으로 나갔다.
안방에는 영미 누나가 있었고, 건너방에 있었던 영자 누나와 나도 누나가 오는 기척에 모두 안방에 모였다.
"니, 무슨 일이 있나?"
영자 누나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별거 아이다. 그저 하루 좀 집에서 쉴라 카는데 와 모두 이래 수선을 피노?"
영숙이 누나의 말에 영자 누나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다섯명이 둘러 앉아 점심을 다 먹을 때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영숙이 누나는 나에게 말을 걸기는커녕 눈길도 한번 주지 않앗다.
사실 가족중에 영숙이 누나의 돌연한 등장에 가장 궁금한 것은 나였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누나가 제재소 사장 및 그 아들과 빠구리를 한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달자까지 끌어들여 해결책을 찾으려 했는데 누나는 이렇게 불쑥 나타나 애매한 말만 하면서 딴청을 피우고 있다.
궁금증을 넘어 나는 불안하고 겁이 나기까지 했다. 괜히 내가 누나의 일에 끼어들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나 때문에 누나가 그 집에서 쫓겨나고 결국 학업도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닐까, ......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지만 얼음장 같은 누나에게서 전혀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영숙이 누나는 계속 나에게 냉랭한 채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잠도 안방에서 엄마와 잤다.
이튿날, 나는 점자를 배우려 영자 누나를 박금순네 집에 데려다 주기로 약속한 날이다.
엄마와 영숙이 누나의 말을 들으니 누나도 아침을 먹고는 바로 웁내로 돌아간다고 했다.
"내도 오늘 큰 누부야캉 내리에 갈 일이 있는데 누부야하고 같이 갈까?"
한참을 망서리다 나는 영숙이 누나가 집에 온 뒤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집밖에서 함께 걷기라도 하면 무언가 누나의 속내를 알 수 있는 말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누나는 내 바램을 여전히 냉랭하게 잘라 버렸다.
"니는 걸어갈꺼 아이가? 내는 버스 타고 바로 읍내로 갈끼다."
영숙이 누나는 아침을 먹자 바로 읍내의 직장으로 돌아갔다. 영자 누나는 "숙제를 제대로 했나 한번 더 검사해 봐야겠다." 며 10장도 넘는 점자들을 다시 일일히 읽는 바람에 꽤 시간이 지체되었다.
누나는 아버지가 사 준 토끼털이 달린 겨울 코트를 입고 꽤 흐믓해 했다. 나도 역시 아버지의 선물인 새 점퍼를 입고 보니 우리는 오랫만에 별로 가난한 티가 나지 않는 남매처럼 생각되어 좀 우쭐했다.
박금순네 집을 향해 가면서 영자 누나는 자주 말을 걸어 왔지만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계속 영숙이 누나가 마음에 걸렸다.
우리가 빠구리 한 것에 대해 영숙이 누나는 크게 후회하고 있으며, 지난번 집을 떠날 때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 고 나한테 다짐했었다. 그 표정이나 언행으로 보아 누나는 크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또 들쭝나게 황달자에게 영숙이 누나의 창피한 사정을 그대로 털어 놓아 누나를 더욱 곤란하게 했다. 내가 달자와 같이 왔다는 것을 알고 경악했던 누나의 표정, 달자와 이야기 하면서 눈물을 훔치던 장면, 나와 헤어질 때 인사는 커녕 눈길도 주지 않아 누나가 나를 얼마나 미워하고 원망하는가를 알만 했다.
그런데 일해야 하는 날에 불쑥 집으로 돌아왔으니 그 이유가 궁금한데 속 시원한 설명이 없어 더욱 답답했다. 혹 나 때문에 누나가 제재소에서 쫓겨난 것은 아닌가. 그럼 학교도 못 다니게 될텐데 ...... 이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나 내리, 바로 박금순네 동네로 접어 들면서 영숙이 누나에 대한 근심보다는 금순을 만난다는 기대에 사로잡혔다.
박금순, --- 가까워 질수록 더욱 새롭고 신비함이 느껴지는 여인이다.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장님이면서도 세련되고 우아한 미인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빠구리를 했을 때 그녀는 숫처녀였고 하지만 보지는 동생 금지처럼 유난히 자지를 물어 주는 것이다. 체격이 큰 것처럼 젖통은 금지보다 훨씬 풍만한데 연분홍빛 젖꼭지는 금지처럼 평시에도 연필의 지우개처럼 봉긋 솟아 있다.
처음과 두번 째 빠구리를 할 때 그녀는 갓 목욕한 몸으로 나를 받아 주었다. 머릿결뿐 아니라 온 몸이 아직 물끼를 머금고 있는 듯 한데 그녀의 몸에서는 항상 향기가 난다.
때로는 찡그리고 수줍어 하면서 빠구리 자체에 겁을 내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몸속에는 또 넘칠듯한 욕구도 깃들어 있다. 하지만 나에게 처음 빠구리를 알게 해준 서울띠기나 다른 여인들처럼 그렇게 열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그런 점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나에게 "오르가즘을 느껴보고 싶다." 는 말까지 했다. 나도 오르가즘으로 환희에 가득 차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
"오늘도 선생님이 또 자고 가라 카마 우째야 되노?"
영자 누나가 말을 걸어 왔다.
"와? ...... 누부야는 그 집에서 자는기 불편하나?"
"아이다. 선생님하고 이야기 하는기 너무 좋다. 세상 일들도 많이 알게 되고 ...... 선생님은 책도 많이 읽으셨고 아는 것도 참 많더라. 하지만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 "
"금순이 누나도 누부야캉 같이 있는게 좋다 안카더나? 서로 좋으마 됐지, 뭐."
"하여튼 내가 동생 잘 둬가 참말로 꿈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누나가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나도 흐뭇함과 함께 누나에게 잘 해주는 금순이 새삼 고마웠다.
그럴수록 더욱 그녀와 빠구리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 오른다. 영자 누나의 말처럼 지금 내가 금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빠구리뿐이다. 나의 욕구 해소뿐 아니라 그녀가 정말 뽕 가도록 정성과 실력을 발휘해 봐야겠다고 새삼 마음을 다졌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일까. 나는 오늘도 허탕을 쳤다.
금순네 집에 금지는 없었으나 창호라는 그녀의 남동생도 함께 있었다. 창호는 22살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군에 입대해 마침 휴가를 나온 것이라는데 군복이 아니라 그저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금순은 영자 누나와 나에게 자기 남동생을 소개시켜 주었다.
분위기로 보아 도저히 이 집에서 금순이와 빠구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누나를 인계했으니 곧 그 집을 나오려 했다.
그러나 금순이 남매가 붙잡아 결국 네명이 소파에 둘러 앉아 차와 과자를 먹으며 잡담을 나누는데 덤덤히 끼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빌려준 책을 벌써 가져오게, 다 읽은 모양이지."
누나는 지난번 금순네 집에서 <헬렌 켈러전>과 <안델센 동화집>을 빌려 갔었다.
"예. 두가지 다 너무 좋았어예."
"어떤 점이 좋았는데 ...... ?"
"그기, 저 ...... "
금순의 질문에 누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헬렌 켈러 이야기는 그 전에 라디오로도 듣고 감명을 많이 받았심더. 그런데 내가 글자를 직접 읽어가면서 내용을 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더욱 감동이 컸어예. 특히 ...... "
누나는 또 머뭇거리며 얼굴을 붉히고 나서 말을 이었다.
"라디오로 들을 때는 듣도 보도 몬하는 헬렌 켈러가 일류 대학까지 들어간기 정말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책으로 차근차근 읽다보이 앤 설리반이라는 선생님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됐심더. 설리반 선생님이 없었으마 헬렌 켈러도 없었겠죠? 내한테는 선생님도 그리 느껴 집니더. 헬렌 켈러가 "내가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제일 먼저 설리반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내도 그리 된다마 선생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심더. 선생님은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죠?"
"아이, 영자가 또 사람 민망하게 하네."
그 두 여인은 모르겠지만 금순이도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미스 문이 잘못 생각했어요. 우리 누나는 볼품 없어. 미스 문이 훨씬 더 아름다워요."
창호가 옆에서 말 참견을 했다. 영숙이 누나를 제재소 반대머리 사장이 "미스 문"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도 금순이 남동생이 영자 누나를 "미스 문"이라고 했다. 그런 호칭이 내게는 좀 생소하게 들렸다. 금촌리에서는 누구도 누나들을 그렇게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얘는 ...... ? 영자가 예쁘다고 하면 되지, 왜 나를 끌어들여 창피를 주니?"
금순이가 동생을 살짝 꼬집으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가 앤 설리반이라면 미스 문이 바로 헬렌 켈러네. 당연히 주인공이 더 예뻐야지."
"아이, 그런기 아이라예."
누나도 얼굴을 붉혔지만 모두 미소를 띄운 채 분위기는 한껏 좋았다.
"<안델센 동화집> 도 너무 좋았심더. 그런 동화를 처음 읽어봐서 너무나 가슴이 저리고 감동적이라예."
분위기에 휩쓸린 것인지 이제 누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 미스 문은 동화라는 것을 처음 알았나요?"
창호가 누나에게 관심이 쏠렸는지 다시 끼어 들었다.
"아이라예. 라디오에서 <신데렐라> 나 <백설공주>, 또 <흥부 놀부> 나 <도깨비 감투> 같은 것들도 더러 들어 봤지예. ...... 그런데 안델센 동화들은 그 내용이 그 전에 알던 것과 많이 다르데요."
"어떤 점이 ...... ?"
창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다른 동화들은 거의 ...... "그래서 주인공은 잘 먹고 잘 살았다." 라는 식으로 끝나잖아예. 그래서 읽는 어린애들에게도 행복과 희망을 심어 주겠죠. 그런데 안델센의 <인어공주> 나 <성냥팔이 소녀> 같은 것은 한 없이 슬프고 불쌍한 이야기들이라예. 그래서 읽는 내도 슬프고 안스러운데 그기 읽고 나서는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보다 더 길고 진한 감동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니 내가 좀 이상한긴가예?"
"이상하긴 ...... 영자가 원래 감정이 풍부해서 그래. 또 슬픈 이야기나 비극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특징도 있는 것 같아. 내가 요즘도 가끔 되새기는 영화, ...... 물론 비극으로 끝나고, 내가 볼 수는 없어도 귀로 들으면서 분위기를 느낀거지만 <전원 교향곡>이라는 영화가 참 감동적이었어."
"<전원 교향곡> ...... ? ...... 그건 베토벤 심포니 6번 아입니꺼?"
누나가 물었다.
"맞아. 그런데 그 영화는 그 제목을 땄지만 내용은 앙드레 지드라는 소설가가 쓴 작품을 영화로 만든거야."
금순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맹아학교 점자교사일 때 보았던 영화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했다.
시골 마을의 목사가 오갈데 없는 맹인소녀 젤트류트를 맡아 보살피게 되면서 차츰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의 아들 역시 젤트류트를 사랑하게 된다. 예기치 못했던 이상한 삼각관계 속에서 그녀는 개안 수술을 해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때문에 그녀는 혼란에 빠진다. 그녀가 감사하고 존경하면서 환상으로 흠 왔던 목사는 늙어서 추하게 까지 보였으며 그렇다고 젊고 잘 생긴 그의 아들과 새롭게 사랑을 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그녀 때문에 부자간에도 미묘한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광명 속에서 오히려 더 큰 혼란과 좌절을 느낀 그녀는 결국 호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는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미스 문은 음악도 많이 아는 모양이네요?"
금순의 이야기가 끝나자 창호가 또 누나에게 물었다.
"아이라예. 그저 라디오로 가끔 들으본 것 뿐이라예."
누나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대답했다.
"아니야. 영자는 천부적으로 음악에 대한 감각을 타고 난 것 같아. 같이 노래를 불러 보거나 다른 음악을 들어봐도 영자의 절대음감이나 음악에 대한 이해는 내가 놀랄 지경이야. 영자가 일찍부터 교육과 접할 수 있었다면 정말 여러가지로 타고 난 재주를 더 꽃 피울 수도 있었을텐데 ..... "
나는 지난날 영자누나가 마마에 걸리기 전 동네의 재롱둥이로 소문날만큼 귀여움을 받았었다는 할아버지의 회한 섞인 말이 다시 생각났다.
"나도 대학 1학년 때 본 <미완성 교향곡> 이 음악과 관련돼 있으면서 참 감명깊게 본 것 중 하나예요."
창호가 또 하나의 영화를 소개했다.
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인 슈베르트는 젊은 시절 가난한 음악가였다. 마침 귀족의 파티에서 연주를 할 기회가 왔는데 그는 연미복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전당포에서 하나를 빌려 입고 자작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데 갑자기 여인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의 연미복에 붙어 있는 전당표를 보고 집주인의 딸이 웃어제낀 것이다.
대부분 가난한 예술가들이 그렇듯 그도 자존심만은 팽배해 있어 악보를 찢으며 연주를 중단,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그런데 그 사건을 계기로 슈베르트는 귀족의 딸과 사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며 그를 떠나 버린다. 사랑과 상심을 동시에 겪게 된 그는 그 반작용처럼 더욱 창작에 몰두한다. 특히 그날 그녀의 집에서 연주했던 악상을 더듬어 심포니로 악보에 옮긴다. 그러나 그녀가 웃음을 터뜨린 대목에 오면 악상이 끊겨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친구의 편지로 결혼한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그 편지를 들고 갈대가 춤추는 들판에서 다시 그녀를 추억한다. 그 배경에는 그가 심혈을 기울인 심포니가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자신에게 선언한다.
"앞으로도 이 곡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다."
금순과 누나는 귀로 듣는 그 이야기만으로도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목이 <미완성 교향곡> 이라고 ...... ? ...... 정말 재미 있겠는데 ...... 우리 읍내에서도 상영했었나?"
금순이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나야 여기 안 있었으니 모르지. 하지만 누나가 관심 있다면 이곳은 누나가 알아보고 서울에서 재개봉할 때는 내가 누나를 모셔서 감상하도록 할께."
"그래? 정말 한번 보고 싶다. 부탁해."
창호의 말에 금순이가 곧 화답했다.
보고 싶은 영화 하나 때문에 서울 나들이를 한다는 그들의 처지가 나한테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 같았다.
또 그들의 나누는 말들 중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많았지만 어떻든 누나가 화제의 중심이 되며 모두 관심을 보여주는 것에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결국 나를 실망시킨 것은 오늘도 금순이와 빠구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학과 음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 사이에 내가 끼어들 수 있는 것도 없는데다 그 틈새에서 내가 금순에게 따로 접근할 여지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누나는 이틀밤을 금순네에서 보내기로 해 나는 사흘 후에 데리러 오기로 했다.
그 집에서 점심까지 얻어 먹고 나왔지만 좋은 음식에 배가 그득한 것과 달리 마음은 허전했다.
나는 다시 율곡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허탕을 쳤지만 다시 김춘자, 강복순과 만나고 싶었다.
춘자네 집 푸른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인기척 때문에 방문을 열고 나온 것은 그녀의 남동생 명수였다. 나를 보자 대뜸 인상을 쓰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표현을 하는 것이라기보다 나를 보자 기분이 나빠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나를 힐끗 보고는 다시 안방문을 열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부야, 니 꼬맹이 친구 왔다."
그래도 좀 기분이 풀어지는 것은 춘자가 나를 반갑게 맞아준 것이다.
"영도 왔나!"
그녀는 나를 보자 방문 앞에서부터 활짝 웃으며 대청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 다음의 행동은 나를 집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우리, 저쨔로 가자."
춘자는 내 손을 잡아 이끌며 대문을 나섰다.
"오늘은 동네 아지매들까지 몰려 와 고스톱을 치고, 국시 말아 묵고, 우리집이 완전히 운동회 하는 날이다. 어디, 복순네 집으로 가보자."
강복순네 집은 그녀의 집에서 고작 백미터 쯤 떨어진 거리였다. 김춘자와 강복순이 왜 항상 같이 다니는가를 알 것 같았다.다만 복순의 집은 스레트 지붕을 했지만 싸릿문이 달린, 지난 날은 초가 삼간이라고 할만큼 적은 집이었다.
"아부지, 저 왔심더."
"아, 춘자가!"
좁은 마당에서 장작을 패는 남자를 보고 춘자가 인사를 하자 곧 그 남자도 알은 체를 했다. 한겨울인데도 팔뚝을 걷고 얼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빙긋 웃음이 나왔다. 구렛나루나 걷어 올린 팔뚝이 온통 털 두성이였다.
서 있어도 겨드랑 털이 삐져 나오고 똥꾸멍까지 이어져 온통 시커멓게 털이 몰려 있는 강복순이 바로 제 아버지를 닮아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나영이가! ...... 니 언제 왔노? ...... 오랫만이네."
건너방의 문을 열며 춘자가 말했다. 복순의 방일텐데 또 다른 누가 있는 모양이다.
"응, 방학 후에도 할 일이 있어서 서울에 머물다가 ...... 집에 온거는 사흘 전이야."
오가는 말로 보아 친구사이 같은데 서울 말투였다.
"아, 춘자 왔나!"
이어서 이 방의 주인인 복순의 소리도 들렸다.
"그래, 영도도 같이 왔다."
"엄마야! 영도가 우리 집에 ...... "
그제서야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며 복순이 얼굴을 내밀고 나에게 웃어 보였다.
"어서 올라 온나."
춘자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자 아까 춘자가 나영이라고 불렀던 여학생을 볼 수 있었다. 우선 피부가 하얗고 단발머리에 안경을 끼고 있는데다 서울말씨를 쓰는 터라 웁내의 여고생인 춘자나 복순이와는 다른 이색적인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색적인 객을 보며 나는 낙담부터 했다. 금순네 집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오늘의 빠구리 기대는 날이 샌 것이다.
"요 앙큼한 가시나 ...... !"
방에 들어선 춘자가 복순에게 쏘아 부쳤다. 억양으로 보아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복순이 좀 당황하는 표정으로 얼굴마저 붉히는 것을 보니 뭔가 꿀리는 것도 있는 모양이다.
"아, ...... 나영이한테 내가 신세 좀 졌다. 우리 학교 수학 선생이 실력이 없는 긴지 의사소통이 안되는 긴지 늘 미적분이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드이 나영이한테 쪼매 배웠는데도 벌써 물리가 터진 것 같은기라."
"오야, 이 얌체 가시나야. 미적분은 내도 깜깜인데 그래, 니 혼자 도둑 공부해가 잘 묵고 잘 살아라."
방안에는 밥상에 교과서와 노트, 문제집 같은 것이 널려 있었다. 상황을 보니 복순이가 나영이에게 수학을 배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둘이 "7공주파" 이기 때문인지 하는 말들이 요상하기까지 하다. 지난번 황달자네 집에서 떼씹을 할 때도 문경미가 빠구리 경험이 없다고 털어 놓자 "배신자" 라며 닥달을 하더니, 여고생이 공부를 한다고 앙큼하다거나 얌체라고 들이대는 것이다.
"참, 귀한 손님들 왔는데 뭐라도 좀 챙기올께."
복순이 방을 나가자 춘자와 나영이 몇마디 서로 안부 인사 같은 것을 나누었다. 오가는 말로 보아 둘은 친구 사인데 나영은 서울말씨에 도시물을 먹은 티가 나서 시골처녀인 춘자와 대조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잠시 후 나영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군것질거리를 갖고 방으로 들어 오려는 복순이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갸가 갸가?"
"맞다."
둘은 나지막히 말해 방 안쪽에 있는 춘자에게는 안 들렸겠지만 문쪽에 앉은 나는 그 말을 얻어 들을 수 있었다. 아마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은데 빙긋 웃음이 나왔다. 서울말을 쓰는 그녀에게서 처음 사투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뒷날 전라도 사투리를 좀 알게 되었을 때 "거시기" 라는 말의 함축된 의미와 다양한 구사에 놀라며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있다.
"갸가 갸가?" 라는 말도 경상도 사투리의 묘미중 하나다. 굳이 설명하자면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냐?" 라는 정도의 뜻이겠지만 단 네글자로 표현할 수 있고 아마 그 때문에 나영도 서울말 대신 사투리를 썼을 것이다.
복순이가 식혜와 강정 몇개를 가져와 하나씩 집어들고 먹는 중 복순이 나와 나영을 서로 소개시켜 주었다.
"야는 영도라고 바로 문경미 동생이다. 쟈는 우리 중학교 동창인데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닌다."
"아, 그러세요? 저는 최나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저 눈인사만 하려던 나는 깜짝 놀랐다. 춘자도 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처음에는 그녀가 나를 놀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에게 장난끼는 전혀 없었다. 춘자나 복순과 동창이라면 경미와도 마찬가지인데 경미 동생이라는 나에게 너무 진지하고 공손하게 하는 말에 오히려 나는 당황해서 얼굴만 붉히며 아무 대꾸를 못했다.
식혜와 강정을 먹는 동안 세 여고생은 계속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나영의 서울 생활과 이곳에 남은 친구들의 이야기들로 나는 흥미도 없을 뿐더러 끼어들 여지도 없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따분하고 어색했다. 그래서 집에 갈 생각으로 엉덩이를 들썩이는데 나영이가 말했다.
"자, 모처럼 이렇게 모였는데 이제 모두 우리 집으로 갈까?"
"뭐라꼬 ...... ?"
춘자가 놀란 표정으로 묻는데 엉거주춤 서 있던 나도 놀럈다. 나영의 말투로 보면 나도 그녀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셈인데 그런 제안 자체가 엉뚱하게 들리는 것이다. 춘자나 복순이도 마찬가지 기분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도 응답을 않고 잠시 침묵이 흐르던 중 머리를 갸우뚱하던 춘자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복순아, 잠깐 내 좀 보자."
춘자가 복순이를 끌고 나가 나영이와 단 둘이 남게 되자 나영이는 외면한 채 입도 다물고 있다. 나는 더욱 자리가 불편했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오줌도 마려운 것 같았다. 마당으로 내려와 변소를 찾아 두리번대는데 부엌 뒤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 ...... 아주 동네 방네 나발을 불고 다니라, 가시나야! 그기 무슨 자랑꺼리라고 우리 클럽도 아닌 아한테 까발기노?"
좀 화가 난듯한 춘자의 목소리였다.
"내사 이래 맞닥뜨릴 줄 알았나?"
이어서 복순이의 좀 풀죽은 소리가 들렸다.
"중학교 3년동안 나영이하고는 내내 단짝이었다. 그래가 지나 내나 온갖 경험이나 마음속을 다 털어 놓는 사이라 양조장 일도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 것 뿐이다. 니가 영도를 우리 집에 안 데려왔으마 그저 얘깃거리로만 지나갔을 거 아이가?"
복순이는 나를 내세워 이제 춘자에게 반격을 가하는 모양이다.
두 여인의 말을 훔쳐 듣던 나도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았다.
복순이는 나와, ...... 어쩌면 "7공주파"의 다른 여고생들과 어울려 빠구리한 것을 나영에게 이야기 했다. "갸가 갸가?" 라면서 나를 확인하고 나서 진지하고 공손하게 나한테 인사한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춘자는 복순이를 닥달했다. 우리가 떼씹을 했을지언정 여고생인 그녀들이 남한테까지 떠들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자 복순이는 춘자가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 저 가시나도 영도하고 하겠다는기가?"
"내도 모른다. 즈그 집 같이 가자 카는 말도 갑자기 나온기라 ...... 어쨌든 쟈도 있는데 우리 집에서 판을 벌릴 수는 없는거 아이가?"
나는 그 자리에 더 머물지 못하고 오줌도 누지 못한 채 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뒤 방에 들어 온 춘자와 복순이가 어떻게 타협을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우리 네명은 모두 최나영의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를 앞장 서 인도하던 나영이 큰 대문 앞에서 멈추었을 때 나는 아, 최군수 집! 하고 기억을 되살렸다.
한 20간 쯤은 되어 보이는 이 큰 기와집은 어른들의 말을 줏어 듣고, 이 앞을 지날 때면 한번씩은 돌아보게 하던 집이었다.
이 집 주인은 최달호로 율곡리에서 출세한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는 우리 군의 군수를 지냈고, 다시 서울에서 꽤 높은 자리까지 공직생활을 하나 정년 퇴임했으며 4.19가 일어난 후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차점으로 낙선했다는 사연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후 최달호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집이 큰데다 모두 "최군수 집" 이라고 불러 나도 이곳을 지나치게 되면 그런 연상을 하게 되는 집이었다.
최군수가 또하나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는 것은 자식들이 모두 공부를 뛰어나게 잘한다는 점이다. 아들, 딸들이 모두 반에서나 전교에서나 1등을 할만큼 공부를 잘했고, 읍내에서 중학교만 마치고 모두 서울에서도 일류 고등학교와 일류 대학교를 다닌다는 것으로도 소문이 나 있었다. 나영은 그 최군수의 막내딸로 역시 서울에서 일류 여고를 다닌다는 것을 뒤에 알았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원은 잘 손질되어 있었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나영은 우리를 곧바로 별채 쪽으로 안내했다.
"내 방은 좀 추울거야. 오빠 방에는 난로도 있으니 그리 갈까?"
그녀의 오빠 방에 들어섰을 때 내 눈에 먼저 뜨이는 것은 난로보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해골이었다. 뒤쪽을 보았을 때는 무슨 도자기인줄 알았는데 춘자가 손을 대다 비명을 질러서 앞에서 봤더니 그림에서 봤던, 눈과 코 자리가 뻥 뚤리고 이빨 몇개가 빠진 채 모두 드러나 있는 해골 바가지였다.
더욱 기괴한 것은 벽에 걸려 있는 두폭의 그림이었다. 송윤초의 안방에서 본 족자처럼 길게 늘어진 그 곳에는 각각 사람의 전신상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다시 몸을 세로로 갈라 한쪽은 해골에 이어서 갈비뼈와 엉치뼈, 대퇴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뼈다귀만 그려져 있고, 다른 반쪽은 소고기 덩이처럼 붉은 몸에 온통 근육과 신경만 그려져 있었다. 또 한장은 몸속을 드러내 허파와 심장, 간과 밥통, 창자등 몸속의 장기들만 나와 있었다. 도자기나 그림이 집안을 장식하는 것이라면 이방 주인의 취미는 정말 기괴한 것 같다.
나영이 석유난로를 피우자 방안은 금방 훈기가 돌았다. 춘자와 복순이도 방을 둘러 보며 기괴한 풍경에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판단은 달랐다.
"아, 이 방이 의사 한다는 느그 오빠 방이가?"
중학교 때 단짝이라던 복순이도 이 방은 처음 와보는 모양이었다.
"의사는 무슨 ...... 아직 본과 3학년인데 ...... 의과대학을 졸업하고도 전문의라고 간판을 걸려면 또 인턴, 레지던트라는 코스를 밟아 모두 한 10년은 공부를 계속해야 해. 큰 오빠 공부하는 것 보니 너무 힘들어서 나는 절대로 의사 같은 것은 안하겠다고 작정했어."
그러고보니 방안의 기괴한 장식물들은 취미가 아니라 학습교재였던 셈이다.
해골이나 인체 해부도 같은 것 말고도 책장에는 영어나 한문으로 된 두꺼운 책들이 뻑뻑하게 쌓여 있었다.
"오빠는 어디 갔노?"
춘자가 묻는데 나도 해골바가지나 내장기관을 공부하는 이 방 주인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미국에 갔어. 방학중에 삼촌댁에 들렸다가 한 열흘쯤은 무전여행을 하겠다나 ...... "
아까 박금순이 보고 싶은 영화 때문에 서울나들이를 한다는 말이 부러웠는데 나영이 오빠는 방학이라고 미국여행까지 하고 있다. 모두 나와는 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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